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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에 가다 23] 순성면 백석리
흰 돌이 많은 왕매실마을 ‘백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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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돌배기, 안골팔부자, 방죽골

 

 2반 자천에 자리한 300년 넘은 상수리나무.

예부터 그릇이나 유리를 만드는 원료인 옥석이 많다 하여 흰돌, 흰들이라 불린 백석리는 총 7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1반은 방죽골이라 불리는데 지금도 논 한가운데 움푹 들어간 방죽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방죽에 고인 물로 1반 아랫동네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단다. 2반은 자천이라 불리는데, 옆 마을인 양유리와 백석리에 걸쳐 척찬리, 자천리라 불렀고 행정구역이 나뉘면서 양유리를 윗자천, 백석리를 아래자천으로 불렀다 한다. 3반은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동네로 대야리, 대하리, 대아리로 불린다. 4반은 백석리의 이름이 유래된 곳으로 차돌배기라 불리는데, 흰색 돌인 차돌이 많아 50여 년 전만해도 차돌을 캐는 작업을 했다 한다. 경로당이 자리한 6반은 ‘긴 산등성이’라는 뜻으로 진득말로 불린다. 7반은 안골로 산으로 둘러쌓인 지형에 차돌광산이 있었다 한다. 안골에는 천석 이상의 부자가 8명이나 살아 ‘안골팔부자’라는 말이 아직도 주민들에게 전래되고 있다.

 


한편 백석리에는 숯을 굽던 가마가 6반에 있었다 한다. 주민들은 6반 일부를 숯거리라 불렀다. 비슷한 마을지명으로는 사기장골이 있는데, 4반에서 사기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어 이름붙었다 한다.
백석리는 순성면에 속하지만 거리상 면천과도 가까워 60여 년 전만해도 주민들의 생활권은 면천과 당진, 합덕으로 나뉘었다.

 

차돌배기를 비롯한 백석리 일대 전경.


“여기서 당진까지는 30리, 합덕은 20리, 면천은 5리야. 그러니 면천시장이 성황을 이룰 때는 면천으로 장을 보러 많이 다녔지. 이후에는 합덕과 당진으로 다녔고. 지금은 버스가 다니니까 당진으로 많이 가는 편이지.”
“왜 아니여. 학교도 1반이랑 7반은 면천으로 다녔지. 그때는 차돌백이가 길이 가장 고약했어. 다들 걸어서 학교를 다녔지. 학교가 없던 시절에는 우리 동네 애들은 양유리에 있는 강습소에 다녔고.”

 

전 주민 참여하는 매실농사

백석리는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논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다. 물론 경지정리가 되기 전, 삽교천이 막히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논농사가 성황을 이루진 못했다. 대게가 대동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농업용수는 1반의 방죽골 정도가 전부였고 대게가 천수답이었다.  지금은 논농사가 가장 많으며 드물게 과수농사와 꽈리고추, 콩, 깨 같은 밭작물을 조금씩 키우고 있다.


백석리만의 특색농업이라면 전 주민이 참여해 함께 키우고 있는 매실나무다. 남원천변과 마을 안길 곳곳에 심은 매실나무 중 일부는 마을 주민들이 참여해 가꿔 수익금은 마을기금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노인회에서 가꿔 노인회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백석리에서 생산한 매실은 전부 순성왕매실영농조합법인이 수매하고 있다. 한편 백석리 부녀회원들과 주민들은 매실한과를 만들어 판매하는 마을기업도 운영하고 있다.

 

(맨 오른쪽부터 시계방향)
이한철(77), 이순영(80), 박헌경(83), 이원영(72), 조남일(72), 구달서(75), 황창연(73), 황철연(73), 이우영(79), 김용태(73)

 

백석리의 고목(古木)

백석리에는 300년이 훌쩍 넘은 고목이 3그루나 된다. 첫 번째 고목은 3반 대야리에 자리하고 있다.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는 흉고둘레가 4.1m에 달하는데다가 수세도 좋아 여름이면 무성한 잎들이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회화나무 아래에는 주민들이 쉴 수 있는 정자도 마련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쯤에는 회화나무 일대가 바다여서 배가 드나들었고, 회화나무에 배를 묶어 정박했을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회화나무 옆에는 마을공동샘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주민들은 “봄이면 느티나무에 생기는 진딧물 때문에 정자에 앉아 있기 힘들 정도”라며 “보호수인데도 진딧물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지금쯤 활짝 피었을 꽃들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백석리의 두 번째 고목은 2반 자천에 자라고 있는 상수리나무다. 수령 300여 년으로 추정되는 상수리나무는 태풍 피해로 곁가지들이 부러져 나가 3반 회화나무보다 수세는 좋지 못했지만 수백년의 세월을 이겨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고목은 안골에 자리한 느티나무다. 주민들은 지금 남아 있는 느티나무는 원래 뒤편에 자라다 죽은 느티나무의 뿌리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황철연 노인회장은 “예전 느티나무에는 구렁이가 살았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고 수호신으로 삼을 만큼 마을의 중요한 고목이었다”며 “느티나무가 죽고 그 아래에 뿌리를 뻗어 느티나무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잘 보존해야 할 중요한 나무”라고 말했다.

 

3반 대야리 회화나무 아래 정자는 주민들의 쉼터다.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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