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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22]
당진 출향인 모여 ‘오손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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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회 당진포럼 정기총회 개최

 

 

당진시 출향인들로 구성된 당진포럼(회장 이충호) 정기총회가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태평소’에서 열렸다.
당진포럼은 2개월에 한 번씩 정기총회 등 모임을 갖고, 출향인들의 초청강연과 함께 친목도모를 하고 있다.
이충호 회장은 “멀리서 찾아온 당진 출향인 여러분들게 감사드린다”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서는 당진출생(1944년, 순성면 봉소리)인 신영무 대한변호사협회장이 초청됐다. 신영무 변호사협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당진 출신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영무 협회장은 이날 강연에서 살아오며 겪은 경험과 철학 등을 말하며, 참석한 출향인들의 호응과 박수를 받았다. 이날 당진포럼에 참석한 김남윤 씨는 “고향을 떠나 생활하다보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며 “출향인 모임이 그 빈 구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신영무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당진에서 태어났기에 지금의 나도 있어”

 

신영무 회장은…

1944년 순성면 봉소리 출생
순성초, 면천중, 서울고,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예일대학교 법과대학 대학원 석·박사과정 졸업
법학박사 학위 취득, 제9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 홍성지원 판사
한국변호사 최초 뉴욕주 변호사회 및
미국연방 변호사회 가입
법무법인 <세종> 고문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2011.2~현재)

“순성면 봉소리 흑석마을 출신이고 ‘촌놈’이 별명이었지요. 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상당히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15일 당진 출신 출향인 모임 ‘당진포럼’에서 초청강연을 맡은 신영무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의 인사말이다.
신영무 회장은 1944년 봉소리에서 7남매 중 6째로 태어나 순성초와 면천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당진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소중하다.

 

“제일 중요한 것이 건강인데 면천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후에 공부하고 일하는 데에 있어 체력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당진은 촌이었고, 순성 흑석마을은 그 시절 산골이나 다름없었다.
“다 고생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뜻을 더 크게 세우고, 강한의지와 체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이후 1968년에는 제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육군법무관으로 군대 시절을 보냈다. 군 법무관 시절 아내를 만나게 됐다.
“아내가 미대를 다니던 시절 만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운명이었다 싶어요.”
하지만 결혼을 하기 전 후에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셋방살이 하던 시절이었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부대에서 남는 시간에 번역하는 일도 했었지요.”
판사를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 갈 결심을 하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큰 도전이었다.

“판사를 하다가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됐죠. 유학 가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든 뭐든 집중하고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일거리도 찾을 수 있었지요.”
신영무 회장은 198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 한국변호사 최초로 뉴욕주 변호사회 및 미국연방 변호사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제 삶에 있어 두 번째 도전은, 미국에서 귀국한 후에 변호사 개업으로 독립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빚을 지기도 했어요. 이후 법률사무소(현 법무법인 세종)를 설립하게 됐죠.”

“변호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
신영무 회장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철학과 신념, 원칙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특히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는 말은 더욱 그렇다.
“변호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돈과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변호사를 하면서 기업이 돈을 많이 낸다고 해도 윤리에 어긋나는 것은 맡지 않았습니다. 돈에 흔들리면 장사꾼이나 다름없습니다. 평판은 한번 깨지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신영무 회장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이유로 당진에서의 삶과 좌절을 이겨낸 경험,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당진에서 살면서 고생도 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면서 좌절도 했지만 이겨낸 것이 당당하게 사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또 양심을 돈이나 권력 때문에 타협한 적도 없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정신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신영무 회장은 명절과 성묘 등으로 1년에 네 차례정도 당진을 오간다. 그동안 당진은 많이 변했다.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고향 당진에 오려면 거의 하루가 소요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교통도 편리해졌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당진이 많이 발전해 변했는데, 그래도 어린시절 기억과 많이 달라져 예전 정취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인생에 중요한 것은 봉사”
2011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된 이후 2년 여간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사실 변협회장을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많이 설득했고 당선돼 사명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동안 느낀 것은 남을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에요. 인생을 살며 중요한 것은 봉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으로서의 고민도 털어놨다.
“과거 변호사는 최고의 지성인, 정의실현, 인권옹호 등 사명을 갖고 자부심이 있었지만 과연 국민이 현재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과거 민주화투쟁을 하던 시절 변호사들은 거리로 나가 같이 투쟁하는 등 국민들이 가깝게 생각했고 인권변호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민주화투쟁 같은 이슈도 적어졌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변호사들도 많습니다.”

“협회장으로서 어떻게 하면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봉사하는 변호사가 되도록 할 것인가가 중점입니다. 법률재단이나 인권재단 등을 통해 다문화가정 도움과 법률구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진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잊지 않았다.
“서울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고 몇 개월간 집에서 모심기와 소를 돌보는 등 농사일을 돕기도 했어요. 그런 것들이 다 도움이 됐어요. 학창시절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면서 책도 많이 읽고 장래에 대한 꿈을 키워야 한다고 봐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자주]  지역에 교육기관이 부족한 탓에 학창 시절부터 타지 생활을 시작해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출향인들이 밀집된 지역을 찾아가 그들이 활동하는 모습과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출향인들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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