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당진시대 시론] 용인술(用人術)에 대하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장옥 석문우체국장, 당진시대 편집자문위원

사전적 의미로 용인술이란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통치자들은 용인을 잘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한(漢)고조 유방(BC 247∼195)이 선택한 장량(장자방)은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 많은 공을 세웠고,  촉한의 유비(161∼223)는 초야에 묻혀있던 제갈량(공명.181∼234)을 얻기 위해 관우, 장비의 큰 불만에도 “삼고초려”를 통해 그를 선택해 위의 조조(曹操)100만 대군과의 적벽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유비는 형주를 놓고 손권과의 이릉전투에서 패한 후 백제성에서 63세의 나이로 병사하면서 후사를 공명에게 부탁하는데 대를 이은 後主(후주) 유선에게도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유선에게 “어질고 밝은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까닭에 전한(前漢)이 융성하였으며,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신하를 멀리한 까닭에 후한(後漢)은 기울어졌음”을 예로 들며 충성된 신하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였다.

공명이 위나라 북벌을 위해 군사를 출동시키면서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리는데 후세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않으면 촉한의 백성이 아니다” 라고 했을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충성심을 담고 있다. 천하의 전략가이자 충신인 공명이 죽자(234년) 결국 유선은 환락에 빠저들어 부패정치로 나라가 기울면서 위나라의 기습공격으로 패망하는데 “백성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 고갈시켰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충신없는 나라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음을 실감케 한다.

 유라시아대륙을 평정하고 원을 건국하여 천하를 호령했던 몽골의 징기스칸은 야율초재(1199∼1243)라는 자가 큰그릇이 될 인재임을 알게된다. 야휼초재는 30여 년간 원태조와 두아들(예종.태종)과 6째황후(내마진후)등 3황재 4대를 거치며 서역원정과 남방출정에 군을 이끌면서 군사적책략과 모략은 물론 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그가 살아생전 몽골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칸이 죽고 2대황제에 오른 오고타이(예종)가 야율초재를 불러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대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라고 묻자 “하나의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하나의 해로운 일을 없애니만 못하고 ,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해로운 일을 없애니만 못합니다(生一事不若滅一事) ”라고 말했다. 그는 일할 때는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았고 국가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충심을 다했으며 군주에게는 직언도 서슴치 않았다.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인 강태공은 늙기까지 가난하여 아내가 가출하였다. 후에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이 인재를 찾아 떠돌던중 위수강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태공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의 인재됨을 알고 그를 주나라 재상에 앉혔고, 그는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웠으며 제나라의 시조가 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장관 등 고위직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한 자가 여럿 발생하고 준비된 대통령임을 강조하며 대탕평을 약속했던 것이 무색해진다.
사람이 없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인재를 찾는데는 초야에 묻혀있든 가난한 자든 나를 지지하지 않은 자든 가리지 말아야한다.

또한 의욕이 넘쳐 새로운 것을 무턱대고 벌이기보다 해로운 것을 없애는 일에 더 치중했으면 하는 바람과, 일방적 통치보다는 소통을 통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국민의 소망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