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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 입력 2013.07.08 09:51
  • 수정 2015.06.12 22:12
  • 호수 968

[우리지역 문화재를 찾아서8] 영탑사
“부처님의 미소를 간직한 영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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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탑사 내에 있는 문화재들에 비해 영탑사는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다. 현재는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탑사는 당진 내에서도 영랑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그만큼 보존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영탑사 법당 내에 자리한 불상이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상이 있고, 그 좌우로 협시불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세 불상은 얼굴이 네모지며 볼에 살이 많고 가늘게 내려 뜬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이 특징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 불상들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그래서인지 도난도 찾았다. 무려 세 번의 분실 사고를 겪었다. 그 때마다 간신히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범종은 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있는 법당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이 종은 ‘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쇠를 녹여 만들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이 가야사에서 만들어져 영탑사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가야사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사여래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약사여래상의 마애불로 지방양식 마애불의 대표작이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약사여래상을 조각했으며 그 후로도 질병의 쾌유를 비는 민속신앙이 성행했다.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이 마애불상은 머리가 팽이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고 얼굴은 우람하면서도 큼직하다. 전반적으로 둔중한 느낌을줘 세련미는 부족하나 친근함이 드러난다.

영탑사 석탑은 법당 뒤편 연화봉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본디 5층 석탑이었으나 1920년 경에 신도에 의해 2층이 더 쌓여져 지금의 7층 석탑이 됐다. 5층 석탑은 고려 중기의 대승 보조국사 지눌이 절 내 정원에 세웠다. 그 후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무학 대사가 천연암석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한다. 현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보물 제409호로 지정돼 있고, 범종은 충남도 지정 문화재 제219호로, 약사여래불상은 충남도 지정 문화재 제111호, 석탑은 충남도 지정 문화재 제216호로 지정돼 있다.

 

[인터뷰] 정재복 성하리 노인회장

“영탑사의 숨겨진 비화”

“옛날에는 이 마을을 절골이라 불렀죠. 근처에 영탑사가 있고 가까운 곳에 수덕사와 개심사가 있어 세 절 잇는 곳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재복 노인회장은 영탑사 석탑이 왜 7층이 됐는지와 영탑사 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을 소개했다.

“석탑이 한 때는 5층이었는데 제 지인의 아버님이 오래도록 자손이 없으니 자손을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2층을 더 올려 쌓았다고 하더군요. 또 탑이 있는 연화봉에 의두암이라는 곳이 있는데 조선 말에 김윤식이라고 판서 벼슬을 지내던 분이 면천으로 귀양을 와서 임금을 향해 용서를 빌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문화유산들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장되거나 잊혀지며 훼손되고 있다. 본지는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발굴해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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