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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 위안부 피해여성 이기정 할머니
“15살 꽃다운 나이 위안부로 끌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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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고향 찾았지만 숨어 살아온 한평생
“그 땐 나도 고왔지.지금은 이렇게 다 늙어버렸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식민지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삼는 위안부를 조직했다. 비밀리에 10대부터 30대까지 가난한 여성들이 돈벌게 해준다는 꼬임과 강압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들은 하루에 40~50명을 상대하도록 강요당했다. 거부하면 매질이 따랐다. 동료 몇몇은 칼에 찔려 죽기도 했다. 자살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죽을 수도 없는 처참한 성노예 생활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고 나를 원망하던 때도 있었지. 위안부로 끌려갔던 당시의 일들이 떠오를 때면 절망감만 가득했어.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에 병만 얻을 뿐이었어.”

우리나라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사람은 236명으로 알려져있지만 주변 시선이 무서워 신고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현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생존자는 57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당진에도 지난 봄까지 5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었지만 현재는 한 명만 남았다.

간호사 모집한다기에 갔더니…

“해방 후 목숨을 건지고 지옥같던 그곳에서 벗어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상황에 아직도 가슴이 무너져. 이제 말하면 무엇하나 속만 아프지.”

이야기를 꺼내는 내내 이기정(91) 할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인터뷰 도중 옛 기억으로 마음이 답답할 때면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달랬다.

이 할머니는 15세 꽃다운 나이에 일본에 의해 위안부에 끌려갔다. 이 할머니의 나이는 너무도 어렸고 전쟁이라는 두려움과 가족들과 떨어져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가는 게 무섭기도 하고 겁도 났다. 서울에서 식당 종업원, 간호사, 공장노동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돈을 벌고자 신청했던 게 화근이었다.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어디로 왜 가야하는지도 몰랐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폭격도 이어졌다. 무섭고 겁이 났다. 잔뜩 분위기에 위축된 채 일본 군인들의 강제적인 인솔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싱가폴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의 군부대였다.

일본 군인들은 부대 내 곳곳에 설치하고 끌려온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집어넣었다. 강제로 달려드는 군인들에게 저항했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함께 끌려간 몇몇의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항상 보초병에 발각돼 총을 맞아 죽거나 붙잡혀 호된 매질을 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 살아갔지. 그러다 싱가폴에서 대만으로 군인들을 따라 이동하는데 혹시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거기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어. 오히려 전쟁이 고조되면서 일본군의 만행이 거세져만 갔지.”

결혼했지만 아이 낳지 못해

그렇게 5년이 지났을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우리나라도 해방됐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 수청리(현재 수청동)에 돌아왔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가족들을 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기지시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숨죽여 살았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로 낙인 찍히는 게 싫어 오랜 기간 동안 ‘위안부 피해자 등록’도 하지 않은 채 살았다.

그러던 중 20세의 나이에 자신보다 곱절의 나이를 먹은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이 할머니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잘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었다.

행복했다. 비록 나이 많은 남편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고민이 있었다면 행복한 삶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위안부 때 기억과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할배 만나 재미나게 살았지. 결혼생활이 하루, 이틀 길어지는 동안 아이에 대한 걱정이 생겼어. 할배가 아이를 만들지 못한 건지,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게 여자 탓이었지. 얼마나 미안하던지…”

장손이었던 남편은 대를 잇기 위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일찍 하늘에 간 동생을 대신해 조카도 보살피고 적적한 삶에 희망을 찾기 위해서 였다. 힘든 생활형편에도 정성을 다해 양아들을 길렀다. 남편도 남편이었지만 자식 없던 터에 양아들은 또 다른 삶의 희망이었다.

울다가도 웃게 만드는 손녀

“아들이 스물 한 살 되던 해 딸을 낳아 우리 내외에게 맡기고 군에 입대했지. 가정형편이 어렵던 터라 며느리도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타지로 떠났고 남아있는 손녀를 내 딸처럼 키웠어. 빈 젖을 물려가며 울음을 달랬고 귀하디 귀한 복덩이로 중학교까지 가르쳤지.”

이제는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이 할머니에게 손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준다. 15살 전쟁터로 끌려갔던 이 할머니의 아픔을 보듬는 건 오로지 손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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