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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4-18 13:5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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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13] 유철환 법무법인 대호 대표변호사
장애 딛고 일어서 부장판사 거친 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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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물단지 소송 등 지역 일에 적극 참여
아버지는 유제연 신평중·고 이사장

▲ >> 유철환 변호사는- 1960년 신평면 금천리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전 서울고등법원 판사 -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 전 서울 중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현 법무법인 대호 대표변호사

유철환 변호사에게 신평중·고등학교는 어린 시절 집이자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1963년과 1972년도에 각각 설립된 신평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이사장 유제연 전 국회의원이 유 변호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신평면 금천리에서 태어나 서정초등학교에 5학년 때까지 다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당시엔 서울에 가려면 반나절 이상 꼬박 걸리던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서정초 다니다 서울로 전학
“당진은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지요. 친구들과  딱지나 구슬치기를 하고, 겨울이면 논에서 썰매를 타는 게 전부였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코를 찔끔거리던 시골 아이들은 순수했고 착했다. 그러다 서울로 전학 오니 ‘서울 깍쟁이’라는 말을 실감했단다. 고향에서는 가난한 친구들이 도화지를 사오지 못하면 반을 잘라 주기도 하면서 서로 보듬고 도와주며 사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서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유 변호사는 “그럴 때 마다 친구들이 더 보고 싶더라”며 “타지에 나와 사니 늘 고향이 그리웠다”고 말했다.

 

소아마비 극복하고 법관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간다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 지내며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아픔이 있다. 돌이 갓 지나면서 소아마비 장애로 왼쪽 다리를 저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장애를 딛고 일어나 지금의 자리에 당당히 섰다.
“학창시절에 친구들의 놀림도 있었고 어려움이 많았죠. 핸디캡이었던 장애가 오히려 공부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몸이 조금 불편하니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그는 이처럼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지금의 삶이 더 감사하다. 1982년에 사법고시(24회)에 합격한 뒤 판사로 임용됐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그만둘 때까지 22년 동안 판사로 일했다.

 

3선 국회의원 아버지 “존경”

신평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현재까지도 이사장을 하며 지역 일에 앞장서온 아버지 유제연 전 국회의원은 제 8·9·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유 변호사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존경심도 크다.

“교육환경이 열악하고 가난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웠어요. 국가에서 교육기관을 설립할 만한 여력이 없었던 거죠. 지역사회 교육기관으로서 신평중·고등학교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당인(새누리당)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유 변호사는 “앞으로 어떤 정치적 행보를 걷게 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법조인으로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애향심, 최선 다해 소송 준비

아무래도 고향이 당진이다 보니 지역현안에 변호사로서 많은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김동완 국회의원 건을 직접 담당했으며, 현재는 예산주물단지 승인취소 소송을 위해 주민들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아무래도 고향의 일이니 더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고향이 발전하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공해산업을 유치하고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9월 항소심에서도 기각돼 대법원 상고를 진행하고 있는 예산주물단지 건설과 관련해 그는 “환경에 대한 대법원의 인식이 비교적 높은 편”이라며 “(선고결과를)기대해 봄직 하다”고 말했다.
“나고 자란 고향이자, 아버지의 정치적 토대가 된 당진을 생각하면 늘 애틋한 마음이에요. 지역에서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계신 분들에게 언제나 감사하죠. 고향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 가겠습니다.”


<편집자주> 서울을 가려면 차로 5~6시간을 가야했고 인천은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시절, 교육환경이 열악했던 고향을 떠나 타지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른 지역에 정착했지만 언제나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출향인들을 만나 지역에 소개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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