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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애국자 우장춘 박사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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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옥 석문우체국장

우장춘(1898∼1959)은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우범선)와 일본인 어머니(사카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장춘이 6살 되던 해에 부친을 잃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그의 어머니는 조센징이라 놀림을 당하는 아들에게 “길가에 핀 저 민들레를 보아라.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 말고 저 민들레처럼 힘든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격려하고 그가 조선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훈육했다.
어머니의 올바른 가정교육 때문일까, 세상의 어떠한 시선에도 변명이나 항변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며 잘 자라준 그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농림성 산하의 농사시험장에 들어가 육종연구에 매진하여 한국인 신분으론 힘든 중간간부인 기수자리까지 올랐다.
1930년 겹꽃 피튜니아의 육종합성에 성공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1936년 5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교 농학박사학위는 물론 세계 육종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우장춘 박사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종의 합성을 실증한 그의 이론은 세계 육종학 교과서에도 인용되고 있다.
1945년 조선은 독립했지만 농촌현실은 처참하여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이 넘쳐났다. 좋은 씨앗을 생산할 수 있는 독자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기술력도, 돈도 없는 현실에서 1947년부터 뜻있는 인사들 사이에서 일본에서 활동중인 우 박사를 주목하고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펼쳤다.
정부도 농업발전을 위해 그의 귀국을 적극 추진하여 1950년 3월 일본에 모친과 처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환국한 그는 추진위원회에서 일본에 남겨진 가족의 생계비로 준 100만 엔 전액을 실험기구, 종자, 육종서적 등으로 사용했다. 가족들과 생이별의 아픔과 사변을 겪는 중에도 부산의 한 연구소에서 오직 한국의 농업위기 극복을 위한 육종연구에 역량을 총동원하였으며,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고 작업복에 검정고무신 차림으로 연구에 힘써 “고무신 박사”로도 불렸다.
1953년에 제주감귤재배를 보급하고 1954년에는 한국토질에 맞는 무와 배추의 새 품종개발에 성공하여 국내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됐으며, 1958년에는 강원도감자로 잘 알려진 무병 씨감자를 개발 보급해 식량난을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숱한 밤샘작업 등으로 몸이 쇄약해져 병세가 악화됐음에도 벼품종개발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다 끝내 1959년 8월 10일 숨을 거뒀다.
그가 사망하기 하루전 병상에 있는 그에게 정부에서는 건국이래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는데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라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토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한 애국자에게 국가가 훈포장조차 수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발했던 청양고추 마저 로열티를 내고 사먹는 종자주권이 상실된 현실에서 그의 위대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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