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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聖君) 세종에게 길을 묻다

최장옥 석문우체국장 당진시대 편집자문위원 당진시대l승인2014.06.28 10:17l(10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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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9년간 27명의 임금 중 성군이라 불리는 분은 4대 임금인 세종이 유일하다. 태종의 셋째로 태어난(1397년)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으며,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질 때까지 책을 읽었음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식견(識見)과 표준(標準)을 갖추었던 것이다.
식견이란 일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효율과 깊은 관계를 갖는 전문지식이요, 표준이란 판단과 결단을 유도하는 윤리성으로,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통치자는 성공할 수 없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세종께서 22세에 권좌에 올라 54세에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국정전반에 수많은 치적을 쌓은 것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쌓은 식견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선정(善政)을 이루었기 때문인데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용인(用人)이다. 약관에 불과한 나이임에도 3정승인 영의정(국무총리)에 황희, 좌의정에 맹사성, 우의정에 박은을 등용했다. 또한 대제학(교육부총리)에 변계량,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조말생, 함경도관찰사(북방사령관)에 김종서, 집현전(학자양성, 학문연구기관) 부제학에 정인지를 비롯한 신숙주, 성삼문 등이 있었다. 심지어 철저한 신분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혈인 과학자 장영실을 등용하는 등 인재를 폭넓게 썼다. 대부분 아버지뻘인 신하들에게 세종의 행동과 언행은 존경과 신뢰를 한껏 받았으며, 32년의 통치 기간 중 황희, 맹사성 등 어질고 능력 있는 신하를 무려 20여 년 이상 가까이 두었다.

둘째, 소통을 중시했다. 그는 현장 중심의 민심을 읽는데 철저했고, 백성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 세종12년 3월, 토지세를 개편하려 했을 때 세종은 300여 명의 경차관(敬差官)을 동원해 전국을 호별 방문함으로써 백성의 의사를 직접 듣게 했다. 그 결과 찬성이 9만8000, 반대가 7만4000으로 나타났음에도 지역에 따라 찬반의 양상이 극심하다는 이유로 이 법안을 폐기했다. 칠년대한 가뭄으로 백성이 굶어 죽어나가자 자신의 부덕함을 눈물로 자성하며 내탕미를 내어 백성을 먹이게 하고 초막을 짓고 기거하며 집무한 것은 백성과 고통을 분담코자 스스로 본을 보이기도 했다.

셋째,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선정(善政)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실천하고 국력을 키웠다. 그림과 글자를 같이 넣어 만든 <삼강행실도>를 편찬해 문맹자도 배우게 했는데, 그 내용이 조선 창건에 반대했던 정몽주의 충절에 대한 찬양(포은운명)과 야은 길재가 이성계에 협력하지 않고 낙향하는 내용(길재항절)이었음에도 포용의 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충절을 본받게 했다. 또한 대마도 정벌과 함경도에 육진을 설치해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방지하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 세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와 장관 후보자들의 많은 결격 의혹들을 바라보면서 국정혼란과 공백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우려스럽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은 국민들의 불안한 심정을 헤아리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성군 세종이 실천했던 용인(用人)과 선정(善政)의 통치 철학을 교훈 삼아 대통령으로서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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