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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전설을 찾아서 9 채운동 채운교
마음 착한 ‘채운 아가씨’가 지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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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채운뜰까지 바닷물 들어와
배 타고 인천으로 가기도

 

옛날 옛적 당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채운이라는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떠나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을 운영했는데, 항상 손님들에게 푸짐한 식사와 친절을 베풀어 마을과 상인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하루는 마을의 부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온 식구들이 슬픔에 잠겨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 사람이 장례 중에 벌떡 일어나며 놀란 가족들에게 “채운 아가씨에게 쌀을 가져다 주라”고 말했다.
그 부자의 말을 들어 보니 죽은 뒤 재판을 받던 중 옥황상제가 “채운이란 아가씨를 아느냐”며 “지금 그 아가씨의 덕미(德米)가 수백 석인데 아직 올 날이 멀어 쌀을 빌려 살아난 후 현세에서 그 아가씨에게 쌀을 갚는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채운 아가씨는 부자로부터 쌀 수백 가마니를 얻었지만 그 쌀로 상인들이 바닷물이 차면 왕래하기 힘들어 했던 장소에 다리를 놓았다. 이 후 사람들은 그 다리를 ‘채운다리’ 라고 불렀다.
이밖에도 채운다리의 이름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멀리서 보면 오색이 영롱한 구름다리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와 나룻배를 하던 뱃사공의 부인이 강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빈 잔을 주며 “채우고 가세요”라고 말해 채운다리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3대 구경거리였던 채운동
채운교는 당진과 고대를 잇는 다리로 방조제를 쌓기 전에는 강의 폭이 넓고, 아산만에서 바닷물이 들어와 상선들이 많았다. 또한 당나라 사신들이 채운포를 통해 내륙을 왕래할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과거 당진 인근의 구경거리로 해미읍성의 문루, 면천읍성의 큰 성돌, 당진읍의 채운포였을 만큼 채운동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또한 현물세를 보관하던 북창(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채운동에 85년째 살고 있는 최익준(95) 옹은 “아주 오래 전엔 당나라 사신들이 당진을 거쳐 공주를 갔다”며 “바닷물이 들어올 땐 사람들이 여기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떠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전에 채운다리는 나무로 돼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을 하는 도중 위치를 조금 옮겨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최 옹은 “이전엔 하루에 두 번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며 “어릴 적친구들과 투망을 챙겨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수영을 하며 놀았다”고 말했다.                          

인터뷰 최익준 옹(95)

 

“방조제 생기고 홍수 피해 줄어”

최익준 옹은 면천면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10살 때쯤 채운동으로 이사와 85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어렸을 때 바다에서 놀고, 배를 구경하러 다녔던 것이 추억으로만 남아 있어 아쉽기도 하지만 마을이 발전한 지금도 좋습니다.”
그는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비가 많이 오면 구룡동부터 채운동까지 물이 가득 찼다”며 “방조제가 생긴 뒤 농사 짓기도 편하고 자연재해가 줄었다”고 말했다.
“빠르게 변하는 당진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 고향 당진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에요.”

 

<편집자주>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진다. 스쳐지나가는 고개, 바위, 길 하나에도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고 숱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지역의 전설들은 당진의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자리를 잃고 사라지고 있다. 이번 기획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많은 이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전달해 지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자 시작됐다.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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