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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2.06 23:44
  • 호수 1046

김학중 시인의 <분홍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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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예술인을 만나다

분홍잠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놓은 점자로 되짚어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듯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 : 판소리에서 가장 늦은 박자
작품설명: 어느 늦가을 탱자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안에 무너지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나가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을 보고 시상이 떠올라 그려낸 시입니다.

 

김겨리(본명 김학중) 작가는
△ 홍익대학교 졸업
△ 2002년 문학과 세상 신인상
△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 현대로템(주)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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