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입력 2015.05.22 23:54
  • 호수 1060

[칼럼]“먼저 간다, 딸들아!”
이동준 당진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첫 번째 유서 습작

오래전부터 유서를 써 두고 싶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기가 막힌 묘비명을 알게 된 어느 여름 날, 그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후로 20여 년 동안 우물쭈물하며 그렇게 미뤄오던 유서 쓰기는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 번쯤은 점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유서 작성의 기획단계에서는 심경이 복잡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 아내, 자식, 친구, 형제… 누구에겐 쓰고, 누구에겐 안 쓰면 서운해 할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비슷한 생각을 가져본 분들은 다들 경험했겠으나, 부모님 앞으로 유서를 쓴다는 것은 통념적인 윤리관으로 설명하기에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첫 문장은 “여보, 미안해!”로 쓰려고 했다. 아,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미안한 일이 한 두 가지도 아니고, 쓸 게 너무 많아 책으로 엮을 분량이어서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만만한 게 자식이다. 딸들에게는 ‘사랑한다’, ‘미안해’, ‘고마워’ 등 부모님이나 아내에게 쉽게 해오지 못한 말들을 일상적으로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작은 정성에도 격하게 기뻐해주는 딸, 큰 서운함에는 ‘흥칫뿡(장난스럽게 삐친 감정을 표현하는 말)’ 한 번으로 털어버리는 딸들이 있어서 나의 유서는 “먼저 간다, 딸들아!”로 시작하기로 했다.

먼저 간다, 딸들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가 자식보다 세상을 먼저 졸업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 그리 서운해 하거나 슬퍼하진 말아라.

뭐 남들처럼 남겨주고 갈 돈이나 집 따위가 없음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니 앞으로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 지는 너희가 더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너희가 이 글을 실감나게 볼 때 쯤, 빚이나 남기지 않았다면 아비로서는 다행이라고 본다. 그래도 하루 한 끼는 빵이나 국수 말고 밥을 먹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다,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쉬는 날은 꼭 청소하고 환기도 시키고, 음식물 쓰레기통은 작은 것을 사용해라. 조금씩 자주 버리는 게 최상이다. 청소할 땐 케빈 컨이나 유키구라모토 앨범을 틀어 놓고 하면 청소가 즐거워진다. 세탁기 돌릴 때는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 볼륨을 올리게 돼서 탈수 끝나고 나면 노래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린다.

책을 읽을 때는 발톱 깎는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서 읽지 말아라, 제발. 15분에서 20분쯤 되면 스트레칭도 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읽었던 책 중에 감명 깊었던 것을 한 번씩 더 읽어라. 구절구절마다 감흥이 덜한 것도 있고, 더 좋아지는 것도 있다. 감흥이 덜한 것은 그 부분에 대해 너희가 졸업해도 좋을 만큼 잘 살아왔다는 것이고, 감흥이 더한 부분은 아직 더 열심히 그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뜻이다.

뭐 가면서까지 이렇게 ‘해라’, ‘말아라’ 잔소리가 많으냐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도 애비는 너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잔소리’밖에 없구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또 하게 되는 말, “사랑한다, 딸들아!”로 끝내고 싶다.

P.S.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적어두었다고 꼭 전해다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