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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은 분단의 상처, 북한이탈주민을 만나다
당진하나회 김순영 회장
압록강 건너 당진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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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도 의미 달라 ‘통역’ 필요
당진, 정착 돕는 기관·센터 없어 발만 동동

 

6.25 전쟁 이후 포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침묵 속에 고통은 깊이 파고들어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강산이 몇 번씩 변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 이산가족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의 허리를 끊어 놓은 휴전선을 건너는 이들로 북한이탈주민은 점차 늘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이탈해 남한에 정착한 주민은 2만7000여 명. 북에서의 삶을 피해 국경을 넘어 택한 남한이지만, 여전히 분단 트라우마와 열악한 환경 속에 숨죽인 채 눈물을 삼키며 살고 있는 현실이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북한이탈주민 김순영 씨는 북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아래 부족함 없이 지냈다. 그의 언니는 <반갑습니다>, <휘파람>으로 유명한 귀순가수 김혜영 씨다.
유복한 생활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가족들도 모르게 5년 간 탈북을 준비했다. 당시 김 씨는 25세였다. 위험한 선택을 했던 아버지를 붙잡고 3개월 간 싸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희는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일관했다.
1997년 1월, 그는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아버지가 압록강 경비원의 주의를 돌려놓았고

김 씨와 언니, 동생 그리고 엄마가 먼저 발을 내딛었다. 강을 거의 다 건널 무렵 경비원이 눈치를 채고 호각을 불기 시작했다. 그 때 아버지는 미리 중국옷을 입은 그들을 가리키며 “옷차림을 보면 중국 애들인데 강에서 놀다가는 것 같다”면서 “다 건너갔는데 뭘 잡으려 하냐”고 말해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이후 아버지도 강을 건넜고 2시간 이후 온 가족이 만날 수 있었다.

속옷 광고에 “이 나라 미쳤구나”
5년 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한 아버지 덕에 탈북 과정이 남들에 비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을 넘어가기 전까지 1년 동안 중국에서 숨어 있어야만 했다. 특히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언니 김혜영 씨와 김 씨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신 동생은 중국어를 몰랐음에도 한족학교를 등록해 다녔다.

집에만 있던 자매에게 아버지는 거듭 “너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은 대한민국”이라며 “말투와 용어, 문화를 배워 놓아라”는 말과 함께 남한의 잡지와 라디오, 드라마, 영화를 건넸다. 처음 여성 잡지를 펼친 김 씨는 모델이 속옷 만 입고 광고하는 모습을 보고 “이 나라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또 라디오에서 여 아나운서의 애교 섞인 말투역시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단다.
이후 한족학교서 중국어를 배운 동생을 통역사로 앞세워 하노이에 관광 비자를 신청해 넘어갔고 하노이 호텔에서 한국대사관과 접촉해 탈북에 성공했다.

정착도우미조차 없는 당진

1998년 5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2001년 남편과 함께 당진을 찾았고 두 자녀를 기르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가 당진을 찾았을 때 북한이탈주민은 단 2명뿐이었다. 이후 영구임대아파트가 들어서며 현재 59명(6월 16일 기준)의 북한이탈주민이 당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정착하는 데 있어 당진은 마땅한 지원처가 없는 실정이다. 김 씨는 “같은 말을 쓸 뿐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며 “감투라는 단어도 북에서는 ‘억울한 누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등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일종의 통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자본주의를 처음 접한 이들은 은행에 대한 이해부터 단순한 계좌이체, 통장개설도 모른다. 여기에 기계 조작까지 익숙지 않아 생활 전반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정도로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

하지만 당진에는 이들의 생활을 돕는 센터·기관이 없어 문제가 심각한 실정이다. 김 씨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를 위해 먼저 온 이들이 북한이탈주민을 도울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순영 씨가 말하는
북한이탈주민의 현실

“전화·교통수단 몰라 사흘 굶어
하나센터에서 북한이탈주민 A씨를 당진에 배정해 준 뒤 반나절 간 공공기관 위치 등만 간략히 설명 후 A씨를 집에 데려다 주고 떠났다. A씨는 밥을 먹기 위해 조리하려 했으나 가스를 연결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나센터에 전화하려 해도 전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당진에는 도우미 및 하나센터가 없어 천안까지 가야 하지만 대중교통 이용 방법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집에서 3일간 굶을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자녀가 특수학급에
북한이탈주민 B씨는 자녀에게 북한에서 온 것이 알려지는 것이 무서워 “절대 나가서 말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녀는 집에서는 말을 잘 했으나 학교와 밖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는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고 초등학교 재학 내내 특수반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이후 김순영 씨가 소식을 접하고 학교 측에 사실을 전했다. 현재 B씨의 자녀는 친구들도 생기고 요리도 배우며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은행도 북한이탈주민 어리둥절
C씨는 당진 모 은행을 찾아 통장을 개설하려 했지만 은행에서조차 북한 이탈주민 확인서를 시청에서 발급받아 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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