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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송하는 할머니 노금희 씨(읍내동·72)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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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수에 녹아나는 일흔 살 인생
파킨슨병 앓고 있는 남편과 함께 외는 시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일흔 살 할머니 노금희 씨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이 시를 가만히 읊고 있노라면 남편(박재룡, 77)이 떠오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두 노부부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지난달부터 노 씨는 시 낭송을 배우기 시작했다. 집안일을 할 때나 잠시 휴식을 취할 때도 쉼 없이 그의 입에선 시가 흘러나왔다. 원래부터 그가 시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의 인생은 시를 읊을 정도로 한가롭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갑상선 암을 투병하며 수술까지 한 그에게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아주 우연히 만난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자신’을 위해 시작한 시 낭송

지난달 노 씨는 아파트 승강기에 붙어있는 한 전단지를 봤다. 당진1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시 낭송 프로그램 수강생 모집 전단지였다. ‘김명회와 함께 자신 있게 말하기’라고 쓰인 전단지에 눈길이 멈춘 그는 뜻밖에 ‘자신 있게’라는 글씨에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할머니 세대 누구나 그러하듯 “여자는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으며 컸던 그는 한 번도 자신 있게 표현하며 살아온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삶을 살고 있지만 내 삶에 ‘자신’은 없었다. 

노금희 씨는 “주변에선 건강이나 챙기지 이 나이에 뭘 배우려 하냐고 타박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당시 암 수술 후 회복하고 있을 때라 차분히 감정을 조절하고, 진정한 나를 찾고자 시 낭송 강의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에겐 시 낭송 수업이 있는 매주 금요일은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고 가장 행복한 하루다. 오전 10시에 강의가 시작하지만, 1시간~30분 먼저 가서 기다릴 정도다. 일흔 살 노인의 열정이 20대 청춘 못지않다.

11살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채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배우지 못했기에 배움의 한이 컸죠. 아쉬움이 많아 일흔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배우고 있네요.”
처음엔 ‘나 같은 늙은이가 시 낭송을 배울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떨치고 한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만난 시는 그의 지친 삶을 위로하고 하루하루를 새 날로 맞이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시를 암송하기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시의 내용을 이해하다보면 재미를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이 많은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가족들도, 주위 사람들도 그가 시 낭송을 배우면서 참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현재 살고 있는 푸르지오 아파트 경로당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아파트 주민들은 요즘 노 씨가 많이 밝아진 것 같다고 칭찬 일색이다. 물론 노 씨 자신이 생각해도 한 달 새 참 많이 변했다. 문득 왜 요즘 기분이 좋을까 생각해봤더니 바로 시 낭송 때문이란다. 시를 암송할 때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제아무리 시를 좋아해도 70대 노인의 기억력은 쉬이 믿지 못한다. 하루종일 종알종알 거리다보니 파킨슨병에 약간의 알츠하이머(치매) 증세까지 보이는 남편도 아내를 따라 시를 외울 정도다.

하루는 시를 읊던 노금희 씨에게 남편 박재룡 씨가 “여보, 틀렸어. 그거 아니야”라며 틀린 구절을 알려줬단다.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15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의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사그라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남편까지 노 씨를 따라 시를 외고 있던 것이다.

“의사가 앞으로 3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네요. 남편이 있기에 제가 있고, 제가 있기에 남편이 있죠. 몸이 불편하지만 남편은 절대 저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넘어지고 엎어져도 자신이 스스로 해보려고 해요. 그런 남편이 존경스러워요.”  

남편과 나를 위한 도전

한편 노 씨는 지난해 5월 가정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남편의 병간호를 보다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그는 “젊어서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기보다는 끝까지 내 손으로 돌보고 싶어 가정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3년 전에는 남편과 함께 좋은 곳으로 여행 다니고 싶어 늘그막에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앞으로도 나를 위해, 남편을 위해 열심히 배우고 도전하며 살고 싶어요. 특히 지금 배우고 있는 시 낭송을 더욱 열심히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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