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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16.05.21 21:43
  • 호수 1109

백제의 발자취 내포에서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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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 복신굴부터 당진 장고항까지
백제부흥군 최후의 항쟁 지역

편집자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내포문화숲길을 다시 걸으며 묻혀있던 역사를 되새기고자 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지역 4개 시·군(당진시, 서산시, 예산군, 홍성군)은 내포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 지역의 유적과 생태자원, 자연경관 등을 이어 4개의 테마가 있는 길을 조성해 ‘내포문화숲길’을 만들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내포가 지닌 역사·문화적 전통과 자연·생태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백제부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백제부흥군길’을 소개한다.

출처 : 내포문화숲길

 

백제 부흥의 역사

백제부흥전쟁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고 나서 시작됐다. 당나라 고종은 13만 대군을 백제에 보내, 신라군 5만 명과 함께 백제를 정벌했다. 두 군대는 사비성을 함락한 이후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인 1만3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당시 백제의 패망을 인정하지 않고 백제부흥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한 세력들을 백제부흥군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백제부흥군의 활약은 백제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임존성 등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부흥전쟁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내포에서는 홍성 오서산의 복신굴, 주류성과 예산의 봉수산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몽산성터까지 백제부흥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석문면 장고항으로 추정되는 백강구까지 연계된다. 백제부흥군길은 당진시에만 총 46.55km의 길이 이어져 있는데, 당진지역의 특성상 높은 산이 없어 걷기에 부담이 없다. 여름에는 숲이 그늘이 돼 햇볕을 막아준다. 걷다보면 정자와 평상 등이 마련돼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임존성에서 전쟁 이끌어

예당저수지를 끼고 있는 예산의 봉수산 정상 부근을 임존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봉수산 정상에는 대련사도 위치해 있는데, 대련사에 있는 3층 석탑은 문화재자료 178호로 지정돼 있다. 봉수산은 비교적 평탄하게 조성돼 있어 무리가 가지 않는다. 특히 봉수산을 오르며 보이는 경치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김학로 당진역사연구소장에 따르면 임존성에서 백제 말기 장군인 흑치상지는 백제가 패망한 후 나당연합군의 횡포에 분노해 뜻을 함께하는 주변의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전쟁을 시작하자 10여일 만에 3만 명이 모였고, 이에 흑치상지는 200여 성을 되찾았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항거지인 임존성에는 복신과 독침, 흑치장지가 백제가 패망한 이후 임존성에서 부흥전쟁을 이끌고 있었다고 나타나 있다.

복신과 도침, 주류성 전쟁 참여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해 나당연합군을 공격했고,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주류성과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전쟁을 전개해 승리했다. 주류성은 임존성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현재 홍성 장곡면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을 올라서면 복신굴이 있는 쉰질바위가 한 눈에 보이고 내원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봄과 가을이면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복신굴에서 풍왕을 기다리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복신이 권력에 오르려 하자 백제 풍왕과 서로 시기하게 됐다고 기록돼 있다. 복신이 병을 칭하고 동굴에 누워 풍왕이 병문안을 올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풍왕이 이를 미리 알고 믿을만한 측근 군사를 대동해 복신을 살해했다. 복신이 병문안 오길 기다린 동굴이 복신굴이며, 복신굴에 있는 바위를 쉰질바위라고 부른다. 보름달이 뜨는 날 복신굴이 위치한 쉰질바위 정상에 오르면 달을 맞을 수 있는데, 이 경관이 아주 뛰어나다. 또한 복신굴은 오서산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한편 662년 풍왕은 복신 등과 논의해 부흥군의 왕성을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663년 신라 장수 흠순과 천존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 남쪽 지방의 거열성·거물성·사평성·덕안성 등을 함락시키자 다시 주류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학로 회장은 “사평성은 현재 신평지역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장고항으로 추정되는 백강구

백제부흥군 내의 권력 투쟁 전부터 복신과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도움을 청해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에 나당연합군도 전쟁 준비를 진행했고, 당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나당연합군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세해 주류성으로 갔다. 한편 풍왕은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과 연합하기 위해 백강으로 가 왜군을 맞는다. 일본서기에는 풍왕이 1만여 명의 왜군을 맞은 곳을 백촌강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 사서에서 말하는 백강과 같은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일부에서는 백강구를 석문면 장고항으로 보고 있다. 

백강구전투는 663년 8월에 벌어진 동아시아 최초의 해상 국제전이었다. 이 해전은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제부흥군은 임존성을 지키던 지수신을 제외하고 모두 패배하거나 항복했다. 이로써 최후의 항전 거점이었던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부흥운동이 끝났다.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임존성, 주류성, 피성, 백강구 전투지는 임존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으로 기록됐다.

백제부흥군길을 걸으며 백제의 역사를 짚어 보는 것은 우리 지역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또 다른 의미를 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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