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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채운할머니 선정된 김춘기 씨(정미면 천의리)
마음도, 얼굴도 고운 채운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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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6개월 간 지극적성 남편 간호
“부족한 내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지…”

 

<채운 아가씨 이야기> 채운동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조선시대 시절, 지금의 채운동에는 북창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북창에는 당시 세금으로 걷던 쌀을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 잠시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북창 앞까지는 바다였는데 서울과 북창을 오가던 뱃사람들이 쉴 수 있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 주막집 딸의 이름이 채운이었고 마음씨와 용모가 아름다워 칭찬이 자자했다. 채운 아가씨는 배고픈 뱃사람들에게 밥을 고봉으로 퍼주고 국도 엄마보다 두 세 국자 더 퍼주곤 했다. 그러던 채운 아가씨가 혼례를 올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뱃사람들은 아가씨를 위해 축의금을 전달했다. 하지만 채운 아가씨는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는 다리 없는 냇가를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뱃사람들을 위해 통나무 두 개를 사 다리를 놓았고 그게 지금의 ‘채운교’다. 그후 채운동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채운 다리에서 주워 왔다”고 말하곤 했다.   

마음도 곱고 얼굴도 예뻤다던 채운 아가씨다. 우리의 채운할머니 김춘기(정미면 천의리·88) 씨도 그렇다. 비록 아가씨 시절이 지나 눈가에 주름이 내려앉았지만 미소만큼은 여전히 곱다.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앞서 기도를 드린다. 언제나 겸손해지라며 자신에게 속삭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빈다. 또 때로는 어두운 우리 사회가 밝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두 손을 모은다. 오늘도 새벽녘부터 돋보기를 콧잔등에 올리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채운할머니 김춘기 씨다.

“너무 얼떨떨했다”
(사)대한노인회 당진시지회가 제1회 채운할머니로 김춘기 씨를 선정했다. 8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채운할머니 상은 효심이 깊고 덕망 있는 노인에게 주는 상이다. 김춘기 씨는 “부족한 내가 상을 받았다”며 “너무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얼떨결에 노인회 정미면분회의 추천을 받아 심사하는 곳까지 따라간 그는 당장 초조함에 상은 뒤로 하고 그 순간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단다. 상을 결정할 때도 도통 이름이 불리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지막 금상에서 호명됐을 때 깜짝 놀랐다. 그는 “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너무 얼떨떨했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도 감탄한 그의 간호
김춘기 씨는 지난 10년 전 남편 故김진영 씨를 먼저 떠나보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6시 무렵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남편에게 가져왔다. 하지만 남편은 도통 일어나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부랴부랴 병원을 갔더니 중풍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의 극진한 간호가 시작됐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는 남편 옆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함께 했다. 밥조차 먹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매일 같이 죽을 쑤고 무나물을 볶았다. 서울에서만 병원을 세 차례 옮겼고 차도가 보이지 않자 집으로 남편을 데리고 내려왔다. 남편이 쓰러지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년 6개월 동안 남편의 손발이 됐다. 혹여 냄새라도 날까 매일 같이 씻겼고, 수시로 소변을 받아냈다. 주변 사람들도 혼자 어려운 병간호를 감당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라고. 그렇게 남편이 눈을 감는 날까지 함께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김 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는 아이가 없어 김 씨의 아버지를 양자로 삼았다. 머슴도 있었고 밥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할머니 덕분에 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그렇게 19세가 됐고 중매로 결혼했다. 혼례 날 처음 남편을 만났고 부부의 연을 맺은 뒤 한평생 남편과 함께 하며 네 아들을 낳아 살았다.

못내 미안한 둘째 아들
하지만 남편은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더 하길 원했던 첫째 아들이 서울로 올라가 학원을 다닌다고 하자 남편은 안 된다고만 했다. 그 때 김 씨가 삯바느질을 해가며 첫째 아들을 공부시켰다. 하지만 지금까지 못내 미안한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지만 남편은 당시 하던 고무신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길 원했고 결국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를 입학하지 못했다. 지금은 송악읍 기지시리에 살며 하루가 멀다 하고 김 씨를 찾는 효자 아들이지만 여전히 김 씨의 마음 속에는 미안함의 응어리가 남아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행복
한평생을 지지고 볶고 살아오니 어느덧 88세다. 이제는 귀도 눈도 어둡다. 그래도 매일 하루가 즐겁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성경을 꺼내 읽는다. 집 뒤에 있는 밭으로 나가 심어 놓은 콩과 깨를 수확하면 주변 집에 한 줌씩 나눠준다. 그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것이 좋다”며 “항상 베풀고 싶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노인일자리사업을 통해 공원 내 쓰레기 줍기 등 소소한 일을 하면서 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그는 “나이가 들어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이렇게 매일 같이 일하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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