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올라가는데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은 3000년 전인 은(慇)나라 시대의 갑골문자에 환관인 내시를 생산하는 기록이 나오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826년)때에 내시제도가 있었고 고려말 공민왕(1330년)때에는 121명 정원의 수장이 종2품인 독립적 내시부가 설치되었다.
중국 한나라 당시에는 10대 혹형(酷刑)중 하나로 궁형(宮刑: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 벌을 받은 이로는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이 대표적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의 사관(史官)을 지냈고 부친도 태사령(太史令)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적 장안(長安)으로 와 많은 책을 읽었으며 20세부터 견문을 넓히고 역사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각지를 답사했다. 28세에 벼슬길에 올라 38세에 태사령에 올랐는데 48세가 되던 해 적국인 흉노 3만 군사와의 전투에서 이릉장군 휘하의 5천결사대가 대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릉이 항복하자 조정은 그의 성토장이 되었는데 사마천이 나서 중과부적이며 최고사령관인 이광리(한무제 애첩의 오빠)의 작전 실패라는 점을 지적하자 격분한 한무제의 괘씸죄에 걸려 사형을 명하고 옥에 가둬졌다. 당시 법이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50만전을 내는 속전과 궁형이 있으나 큰 돈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는 궁형(宮刑)을 택했다.
궁형에 처해지면 생식기를 고환까지 단칼에 잘라내 요도만 남는데 요도에 큰 거위털을 박아 잠실인 난방에 내처진다. 이는 후유증으로 급속한 저체온증과 소변을 못 봐 요독증으로 죽는 것에 대한 방지책이었다. 궁형은 심리적·정신적 고통까지 수반하는 치욕의 형벌임에도 사마천이 궁형을 자청해 목숨을 부지하려한 것은 42세부터 쓰기 시작해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史記) 때문이었으며 옥중에서도 집필했다. 그는 황제시대부터 무제 태시2년(기원전90년)까지의 역사를 다뤘는데 무려 130편 52만6500자를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과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썼으며 56세에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했다.
조선시대 내시 중 김처선은 단종 임금부터 연산군까지 다섯의 임금을 시종했는데 임금이 잘못하면 충정을 담아 직언을 서슴지 않아 미움을 받고 삭탈관직이 돼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곤 했다. 성종 9년(1478년)에는 내시로서 최고위직인 종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연산군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향락에 빠져 들어 흥청, 운평, 채홍 등을 두고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살았는데 죽음을 각오한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다. 부디 정신 차리고 종사를 챙기시라”며 직언을 하자 격분한 연산군은 활로 쏘고 칼로 다리와 혀를 잘라 죽였으며, 그 부모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김처선의 처(處)자 사용을 금하여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豐頭舞)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있을 때 세월호 사고가 났는데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수습이 끝날 때 까지 방송을 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한 녹취록이 공개되어 보도통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그동안 대통령을 비판하면 알러지 반응을 보여왔다. 오죽했으면 진중권 교수는 이 대표를 “내시처럼 굴면 곤란하다”면서 내시에 비유했는데, 정치적 내시란 신체적 결핍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도덕성과 정치적 철학을 거세하고 오직 출세지향과 보스의 뜻과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을 말하며, 내시라고 비꼰 것은 생식능력이 아니라 아부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집권당 대표는 내관 못지않게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으니 흠 많은 인의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 남북문제, 노사문제,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 안전 등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민생을 챙기는 데에만 남은 임기 최선을 다할 것을 호소해 주기를 국민들은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