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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사진
  • 입력 2016.10.20 21:29
  • 수정 2017.08.11 23:14
  • 호수 1129

강근묵 고대면 당진포 2리
고참이 서리한 꿀맛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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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대면 당진포2리에서 태어나, 고산초를 졸업한 후 인천으로 올라갔다. 중·고등학생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나는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만약 내가 육상으로 대학을 진학했다면, 아마 체육교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젊은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2년간 근무를 했다. 주로 경기지역을 다니면서  주민 의료봉사, 반공교육, 홍보활동 등을 맡았다.

나는 낙천적이고 유머있었고, 음악을 참 좋아했다. 특히 쎄시봉을 좋아했다. 서울에서 쎄시봉이 노래한다고 하면, 직접 보러가곤 했다.
나는 사진이 참 많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온 ‘길’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태어난 지 100일 됐을 때 부모님과 찍은 기념 사진이다.
난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질병 등으로 태어난지 얼마 안돼 죽는 아기들이 많았다.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당시 100일을 넘긴 것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었고, 이후 이 사진을 잘 보관해오고 있다. 아버지가 어릴 적 내 모습을 많이 찍어준 만큼, 나도 내 자녀들의 어릴 적 모습을 많이 찍어주곤 했다.

두 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고대면 당진포2리에서 태어난 토박이고, 대대손손 조상들도 고대면 당진포2리 출신이다. 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당진엔 오솔길 밖에 없어 배를 타야만 인천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명의 여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양보했고, 나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것이 한이 됐는지, 나만 보면 그렇게 울곤 하셨다. 반면 어머니는 나중에 농사짓는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며 나를 토닥이셨는데, 살다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가끔 인천에서 열리는 동창회에 나가면 친구들은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부럽다고 한다.

세 번째 사진은 군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치악산 밑에서 3년간 군 생활을 했다. 군에서는 참 재밌는 추억을 많이 쌓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일주일됐을 때 자고 있는 우리들을 고참이 깨웠다. 일어나면서 ‘무엇이 또 잘못 됐구나, 큰 일이 벌어지겠구나’하고 걱정했는데, 고참이 서리해 온 사과를 먹으라며 주더라.
딱 이 시기였는데, 그 사과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때 고참이 사과를 너무 많이 서리해서 부대 천장에 숨겨놓고 몰래 꺼내먹었던 기억이 난다.

네 번째 사진은 약혼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1975년에 군대 제대를 하고, 1977년에 중매로 만난 고대면 항곡리 출신 아내와 결혼했다. 아직도 아내의 가족들을 만난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맞선은 다방과 빵집에서 주로 보곤 했는데, 장인과 처남이 아내와 함께 나왔왔다. 장인과 처남의 키가 컸는데, 내눈엔 마치 전봇대 같았다. 그 자리에서 장인어른은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시집보내면 딸이 고생할 것 같다나. 그래서 나는 결혼시켜주지 않으실까봐 걱정됐다.

다섯 번째 사진은 고대면농촌지도자회 회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어느덧 그들과 이어온 우정이 30년이다. 1970년대에 교통수단은 오직 오토바이였다. 열댓 명이 비포장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선  먼지를 날리며 달리기도 했다.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회원들과 앞으로도 희노애락을 함게 나누며 즐거운 시간 보내고 싶다. 그리고 건강이 최고이니 회원들이 항상 건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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