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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의 전투 백제의 굽히지 않는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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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아 , 니가 거시기 해야 쓰것다”

1400년 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의 사비성(지금의 부여)로 향해 군사들이 쳐들어온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던 백제의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불러 어렵게 이야기한다. 의자왕이 계백에게 전쟁에 나가 줄 것 을 부탁하는 영화 ‘황산벌’ 의 대사이다. 1월의 9일 계백의 유구가 발견된 그날의 이갸기를 영화와 함께 풀어가고자 한다.

 

백제를 지킨 마지막 장수

660년 신라의 무열왕인 김춘추는 당나라에 연합을 요청하고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당은 신라의 제안이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받아드린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의 13만 군대는 바다를 이용하여 백제의 기벌포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의군대는 육로를 이용해 공격해 왔다. 전쟁에 앞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계백은 전쟁터로 나서기 전 “아내와 자식이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 가족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황산벌 전투는 4번의 백제군의 승리로 돌아가는 듯 했으나 신라 화랑인 관창의 용기 있는 죽음으로 힘을 얻은 신라군대는 마지막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승리를 얻는다. 이로 인해 백제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계백의 충정 우리마음속에 다시 살아나다.

영화‘황산벌’에서는 김유신 앞에서 계백이 죽음을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전하는 이야기로는 전투가 끝이 나고 김유신이 계백의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전투 중에 전사한 계백의 시신을 마을사람들이 비밀리에 묻어 장사지내고 제사도 드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충곡서원이라는 사당을 지어서 계백의 충정을 기리기도 하였다. 그 후로 1966년 1월9일 황산벌과 가까운 곳에서 계백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고 많은 부분이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던 묘를 다시 복구하였고 ‘백제계백장군지묘’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황산벌 전투가 1400년 전의 단 하루의 전투였음에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는 크다. 위기를 준비하지 못하고 자만했던 왕과 권력자들, 계백과 같은 충정들.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듯하다.

 

계성초 3학년 민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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