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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효심 깊은 94세 노인 오재환 씨(순성면 봉소리)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 미어져”

수 십 년째 아침마다 부모님 산소에 성묘
6.25때 황해도에서 연평도로 피난
머슴살이하며 10식구 생계 책임져
효심 본받은 자녀들...한의사·교사`·대기업 종사
이영민l승인2017.05.12 19:26l(1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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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재환·안농춘 부부

“6.25 전쟁이 터지면서 살기 위해 정신없이 남한으로 내려왔어. 옆 동네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길가에는 잘린 팔다리가 나뒹굴었지. 정말로 끔찍했어. 10명의 식구들이 모두 살아서 연평도로 피난 온 것은 기적이야.”
 
고달팠던 난민살이
순성면 봉소리에 살고 있는 오재환 씨는 1922년생으로 94세의 고령 노인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10명의 식구와 함께 연평도로 내려왔다. 고향과 집을 잃은 그는 남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야말로 ‘찬밥신세’였다. 아니 찬밥마저도 고마울 정도로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는 인심 좋은 충청도로 가자고 했다. 다행히 지인이 살고 있는 청양군 남양면 온적리에 작게나마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청양에서 반년쯤 살았을까. 그의 가족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난민정착사업의 일환으로 당진시 순성면 본리로 이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궁핍했다. 나이가 든 부모님이 일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군대에 끌려간 형님은 팔이 골절돼 돌아왔기 때문에 혼자서 식구 10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포도 농사로 5남매 키워
3년간 나라에서 주는 쌀로 끼니를 때웠다. 여기에 머슴살이를 해서 받은 쌀을 더해야 간신히 식구가 살아갈 수 있었다. 형님네 식구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졌다. 이후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벌이가 나름 괜찮았다. 해마다 쌀 100가마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났다. 그제야 가족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포도 농사로 돈을 벌어 5남매를 키웠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이들은 번듯하게 잘 자랐다. 첫째는 대기업에 입사했으며, 둘째는 국어교사로 일하고 있다. 셋째는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고, 막내는 한의사, 딸은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단다. 오 씨는 힘들게 살았지만 자식들만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얼굴에 번진다고 했다.
 
부모님 산소도 함께 봉소리로
50년 동안 순성면 본리에 살았던 오 씨는 10년 전 봉소리로 이사했다. 당시 본리에 산업단지가 들어온다고 해서 온전하게 모셔야 할 부모님의 산소가 훼손될까봐 걱정이 앞섰던 오 씨는 뒤도 안돌아보고 집 이사와 함께 산소 이장를 결정했다. 이사를 하면서 2층 단독주택을 지었다. 인생에서 번듯한 집은 처음이었다. 오 씨는 “딱히 효도하라고 아이들을 가르친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본받기라도 한 듯,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녀들이 집을 짓겠다고 나섰다”며 “자식들에게 참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 지은 집 뒤에 본리에 있던 부모님의 산소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덧붙였다.

 
매일 새벽 5시 일어나 성묘
오 씨의 하루는 길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부모님 산소에 가서 성묘를 드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묘를 드리고 있다. 매일 두 번씩 절을 하고 내려오는데, 산소 앞 움푹 팬 자리가 그의 효심을 말해준다. 오 씨는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부모님께서 키워준 마음을 생각하면 100번이라도 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 남은 여생도 지금처럼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고싶다”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고향 황해도에서 한문 선생님이었어.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돈도 받지 않고 글을 가르쳐줬지. 유교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셨는데, 자연스럽게 나도 아버지의 생각을 본받고 따르게 된 것 같아.”
 
가장 행복한 성묘 가는 길
6.25 전쟁이 터지면서 자식만 챙기고 자신의 부모님을 두고 내려온 아버지·어머니를 생각하면 오 씨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한편으로는 자식을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 수십 번 생각했다.

오 씨는 매일 아침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산소에 절을 올린다. 자식들도 나를 본받았으면 좋겠지만,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저 깨닫길 바랄 뿐이다. 유 씨는 “돌이켜보면 힘든 인생이었지만 의미 있는 삶이었다”며 “성묘길에 오를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영민  erfgp9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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