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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을 보고
인간의 정의,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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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기계 몸에 인간의 두뇌가 삽입된 존재가 만들어진다. “메이저”,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계이자 첨단의 병기로 탄생한 그녀는 뛰어난 능력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한다.

엄청난 성능을 가진 그녀의 몸은 다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몸의 일부가 인공으로 만들어진 의체이다. 눈을 다치면 성능 좋은 렌즈를 박고 심지어는 술을 맘껏 마시기 위해 인공 간을 이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몸은 필요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일 뿐이다. 영화는 뇌까지도 전자화해서 다른 사람의 뇌를 해킹하거나 가짜 기억을 주입할 수 있는 극단적인 몸의 수단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몸의 수단화는 불가피하게 자기 몸으로부터의 소외를 불러온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람이다.

그 가시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그 손은 내 손이라 할 수 없다. 팔이 잘라졌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곧 새 팔로 대체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몸 전체를 바꿀 수 있다면, 설령 그 몸이 아무리 아름답다할지라도 나는 나의 나됨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나는 나의 못생김, 나의 단점, 내 몸의 질병까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나”이며, 더구나 나의 완벽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모두와 구별되는 “내”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사이보그화된 인간이 단지 영화적 상상력일 뿐일까? 이 영화가 일본만화의 실사 판이라지만 보형물을 집어넣어 코를 높이고 턱을 깎아 정형화된 얼굴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이 영화의 실사이며, 스마트폰이라는 기계에 접속하지 않고는 단 한시도 살지 못하는 한, 우리 역시 이미 기계인간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지점으로의 출발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화에서는 자기의 정체성 때문에 갈등하는 주인공에게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위이며, 고스트(정신)”라고 대답해 준다.

즉 “어떻게 사는가?”가 인간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비록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시해 주는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인간의 몸을 껍데기(쉘)로 규정하고 정신(고스트)에 방점을 찍은 것이 못내 아쉽다.

김현정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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