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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담긴 이야기 <그날>
조선의 선비, 면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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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7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전한 순국한 최익현 선생, 그는 한평생을 권력과 위협에도 옳음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였다.

찾아오는 이가 많이 없었던지 무덤은 고요하고 한가로웠다. 본래 무덤의 위치는 논산의 국도변에 있었는데 이곳을 찾는 참배객이 많아지자 일본이 선생의 묘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예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우리 지역과 가까운 예산에 최익현 선생의 묘가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선비의 삶
조선은 상소의 역사라 할 만큼 많은 상소가 왕에게 올려졌다. 임금에게 정사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정책에 쓰이기도 했으며 임금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린 사람이 유배를 가기도 했다. 면암 최익현도 그러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일에 소신과 신념을 다해 상소를 올렸다.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우리나라와 불평등조약을 맺으려 할 때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 이는 “저의 상소를 들어줄 수 없다면 이 도끼로 저를 죽여주십시오”라는 매우 강경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또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됐을 때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조약체결에 적극나선 다섯 명의 대신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무시됐고, 더 이상 상소문을 올려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때 최익현의 나이 74세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를 가면서 버선 속에 조선의 흙을 한줌 넣었다. 살아서는 일본 땅을 밟을 수 없다는 그의 꼿꼿함이었다. 대마도에 끌려가서도 일본 땅에서 난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을 했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그의 삶을 통해 지금을 보다.
젊은 시절부터 50년에 걸쳐 왕에게 바른 소리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을 통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지 못해 생겨난 지금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된다.

바른 것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좀 더 정의로워질 것이다. 돌아오는 길, 뒤로 보이는 최익현 선생의 묘가 쓸쓸해 보였다.

어린이기자단 계성초 5학년 성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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