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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7
최시형 동학을 재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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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가 처형되기 직전 옥바라지 하던 곽덕원을 통해 도통을 이을 최경상(후일 최시형)에게 전한 말은 고비원주(高飛遠走)였다. 고비원주는 단순히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나라는 뜻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드시 살아서 동학의 높고 깊은 뜻을 세상에 널리 펼치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후일 최시형은 최제우 대선생의 마지막 뜻에 따라 평생에 걸쳐 멀리 도망 다니며 동학의 큰 뜻을 높이 날아 펼쳤다.

교조 최제우의 처형으로 동학은 조선민중들에게 서학으로 몰려 외면 받았고,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던 조직체계는 완전히 파괴돼 재기불능의 상태가 됐다. 동학조직에서 최제우와 함께 했던 백사길, 강원보 등 핵심 측근들은 목숨은 구했지만 멀리 정배가게 됐고, 최시형 등은 체포는 면했지만 관의 지목과 감시를 피해야 했다.

최시형은 이렇게 파괴된 동학조직을 도망살이를 하면서 하나씩 재건해 나갔다. 최시형이 재건한 동학조직은 주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경북, 충북, 강원 등이었는데, 이는 험준한 산악지역을 택해 감시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결과였다. 산간지방을 오가며 도망 살이를 한 최시형은 동학 조직을 재건한 것만이 아니라 동학의 사상적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1877년 이후에는 최제우 대선생의 글과 말씀을 모아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해 동학의 종교적 체계를 완성했다. 최시형이 도망 살이를 하는 동안 했던 또 하나는 꾸준히 강론을 열어 동학도인들에게 최제우 대선생의 뜻을 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론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1865년 10월에는 강론을 통해 ‘인내천(人乃天)’을 말했다. 인내천은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뜻이다. 최제우의 ‘한울님이 네 몸 안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사람이 곧 한울님’이니 모든 사람은 귀천의 차이가 없이 존중해야 한다는 ‘인내천 사상’으로 체계화 한 것이다.

‘인내천 사상’은 1890년에 ‘내수도문’을 통해 ‘어린아이들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으로 더욱 체계화해 어린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신 존엄한 인간이라는 생명존중과 평등사상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최시형의 피어린 노력의 결과 마침내 1880년대 이후에는 산간 지역을 벗어나 전 조선 전역으로 동학 조직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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