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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산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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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내포지방에 오다

내포지방과 면천, 당진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도 최시형이 동학조직을 체계화해 산간지방을 벗어나 호서, 호남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1880년대 전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내포지방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내포지방 동학 거두로 안교선, 박인호, 박희인, 이창구를 들 수 있는데, 이들 중 기록을 통해 동학 입도 시기를 알 수 있는 안교선, 박인호의 예를 통해 보면, 대체로 이 시기와 일치한다.

안교선은 유성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아산대접주로 활동하였는데, 후일 체포되어 남벌원에서 성재식, 최재호 등과 함께 처형당한 인물이고, 그의 일가들이 내포지방에 처음으로 동학을 전래하고 포덕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교선 일가가 동학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877년부터다.

안교선은 1883년 6월 공주접이 자금을 마련해 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경주판 ‘동경대전’ 발문에 충청도 공주 도인 윤상오와 함께 실무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안교선 일가는 일찍이 동학에 입도해 활동했고, 아산지역에는 1880년대 이전에 동학이 전래돼 있었으며, 상당한 정도의 조직력을 갖추고 재정적 뒷받침이 가능할 정도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당진은 지리적으로 아산에 접하고 있어, 당진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도 상호 교류가 빈번했던 내포지역의 특성상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내포지역에 동학이 전파되는 경로도 아산에서 예산, 당진을 거쳐 서산과 태안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포지역에 동학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에는 박인호의 역할이 컸다. 박인호는 후일 동학이 천도교로 합법화된 이후 천도교 4대 대도주가 된 인물로 1855년 2월 1일 현재의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박인호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그의 나이 29살이던 1883년 3월로, 예산 오리정 주막집 주인 박첨지와 주모 월화에게서 동학을 알게 돼 입도했다고 한다.*

박인호는 동학에 입도한 이후 내포지방에 동학을 전파하는 산파역을 담당했는데, 박희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동학에 입도시켰다고 알려진다. 박희인은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내포지방 전체에 동학을 전파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이창구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떤 과정으로 동학에 입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안교선, 박인호, 박희인과 비슷한 시기에 동학에 입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내포지방을 대표하는 접주들의 동학 입도 과정을 보면 이미 1880년대 초에 내포지방에는 일정한 정도로 동학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 시기에는 당진지역도 다른 내포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재, 1997, 『춘암 박인호 연구』,예산문화원,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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