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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7.06.12 08:21
  • 호수 1162

[독자기고]최병부 당진문화원 대의원
추억의 향토문화유적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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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야가 짙은 녹색으로 서서히 뒤덮혀 가고, 아카시아 그윽한 향기가 잔잔히 불어오는 싱그러운 5월에 나는 당진문화원에서 실시하는 <2017 향토문화유적탐방>에 참가하였다.

오전 8시 당진문화원 일행 43명은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차창 밖에는 생명의 뿌리를 내린 만물들이 그 깊이를 더하고, 봄의 열기를 더 한층 뿜어내는 끝없는 벌판에는 극심한 가뭄을 이겨 내면서 모심기에 한창인 들판이 차창 밖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어느덧 관광버스는 여주시에 도착하였다. 여주는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 야평산원(野平山遠)이었다.

이처럼 여주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해서 일찍부터 낙토(樂土)라 칭하여 왔던 곳이며,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문화의 고장이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제46호로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1851년 철종 2년에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으며, 1687년 숙종 13년에 지어진 집으로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현재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이렇게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었다.

명성황후 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과 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민 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刀)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향토문화재 제5호인 민유중 신도비 등 명성황후의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되새겨 보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었다.

다음으로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說)이 있는 신륵사를 찾았다. 이곳은 1376년, 고려 말인 우왕 2년에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이 달하는 대찰(大刹)이었다고 하며 1472년, 조선 성종 3년에는 영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일행은 여주 역사의 고증자료 및 문화예술, 역사유물 등의 자료를 수집·보관· 전시하고 향토사를 조사, 연구하여 교육 자료로 제공함으로써 향토의식을 함양시키고 시민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여주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이곳은 여주지역 국가귀속 출토유물과 그간 수집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대표 전시유물로는 여주시가 새겨진 술병, 원향사지청동소종, 남악 윤승길 영정,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탑비비신이 전시되어 있었고, 고종황제 애착문도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이며 사적 195호로 지정되어있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영릉(英陵,세종대왕)능과 마지막 일정인 영릉(寧陵, 효종대왕)능으로 향했다.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 (寧陵)연결하는 길인 왕의 숲길은  조선왕조 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 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하였다는 길로, 걸으면서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았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강은 끝없이 짙푸르고/ 물위에 나는 새 한결 더 희게 보인다./ 산 또한 푸르러 / 꽃은  더욱 더 타는 듯 붉다. / 고운 이봄을 덧없이 / 그대로 보내고 / 나는 언제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 두보의 시를 읊조리며 집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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