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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6]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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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수운 최제우 대선생에 의해서 창시된 민족 종교다. 최제우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이후 이를 설파하기 시작했는데 동학의 창도는 조선말기의 혼란스런 사회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성리학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사회는 세도정치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적 통치이념으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기본질서가 파괴됐다. 이렇듯 조선 말기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체제가 수명을 다하여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만연과 신분적 질서가 무너져 갔다.

최제우는 영남 최고의 유림이던 근암공 최옥의 외아들이었고, 이런 혼돈의 시대에서 고뇌하던 지식인으로 사회적 구원을 추구하는 가운데 동학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최제우는 1862년 ‘논학문’에서 동학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했다.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천도라 하나 학은 동학이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서를 어찌 동이라 하며, 동을 어찌 서라 하겠는가”라고 해 동학이 조선에서 나온 조선사회의 고통과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등장한 동학이 조선 민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신분적 불평등으로 고통 받던 조선민중에게 메시아적 의미로 다가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동학이 추구하는 유무상자(有無相資)를 통한 대동세상 추구는 동학을 하면 최소한 굶어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게 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조선민중이 동학 깃발 아래 모여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학의 급속한 전파와 확산은 오히려 조선 조정과 유생들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공교롭게도 동학은 유생들에 의해 서학으로 규정돼 배척받았으며 최제우는 조선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1864년 대구장대에서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로 처형당했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고 포덕하면서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권학가, 논학문 등을 지어 동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웠는데, 특히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로 지어 퍼트림으로써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최제우는 또한 동학을 포덕하면서 조직체계를 정비해 나갔는데, 보부상의 조직체계인 접주제도를 차용하여 동학의 기본적 조직체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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