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9
더 이상 희망이 없었던 조선사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이 실천한 생명존중사상, 평등사상이 얼마나 많은 조선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실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홍종학의 증언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홍종학은 “봄 잔디에 불붙듯이 포덕이 어찌 잘되는지 불과 1, 2삭 안에 서산 일군이 거의 동학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시운이 번복하는 까닭이요, 만민평등을 표방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재래로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놈 등 온갖 하층계급은 물밀듯이 다 들어와 버렸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홍종학은 동학의 평등사상이 불평등과 차별로 불만이 가득한 하층민의 호응과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고 판단하였다. 불과 한 달 만에 당시 서산군 전체가 동학화가 되었다고 하니 조선민중들에게 동학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사회는 어떤 상태였고, 조선민중들이 받았던 고통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삼아 국가를 운영하였고, 양반을 중심으로 반상을 구별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모든 국정 운영은 문, 무반으로 불리는 양반계급만이 출사해 국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양반에 속하지 못한 평민이나 양반이지만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토착화된 향반, 양반의 배다른 자식인 서얼 출신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출사하여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대우받고 살 수 없었다. 세도정치가 일반화된 이후에는 내로라하는 양반이라 해도 권력에서 멀어지면 다시는 출사의 길이 열리지 않았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는 극히 제한되었고, 과거시험 자체가 부정과 청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권력에 가까이 있지 않으면 실력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낮 사치스런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런 철저한 계급사회, 불평등과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사는 조선민중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사회의 제도화된 불평등과 차별은 한편으로는 조선민중에게 고통을 안겨줬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항할 명분을 주었다. 1800년을 전후로 등장하기 시작한 역모사건은 하나같이 새 세상을 열겠다는 도참사상을 앞세운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다. 대표적인 역모사건으로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는데 홍경래의 난은 유별나게 차별을 당했던 서북지방 민중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해 일으킨 민중봉기였다. 홍경래의 난은 어렵게 평정되었지만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했던 정신만은 꺾지 못했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