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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6 13:01
  • 호수 1067

땀과 인내가 깃든 희망의 발차기
세상사는 이야기
태권도 국가대표 전 장경훈 선수(정미면 덕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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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아니어도 괜찮아…”세상 알아가는 과정”
광저우 아시안게임 출전 앞두고 모친상
박사학위 준비 “체육관 개관하고 싶어”

“1등만 기억하는 세상, 결과만 중시하는 문화죠. 하지만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대표로서 큰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그동안 흘렸던 땀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장경훈 씨는 5살 무렵 태권도를 시작했다. 서산이 고향이었지만 부모님을 따라 인천으로 올라가면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처음엔 도복을 돌돌 말아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형들이 멋져보여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다짐했다. 7살 때는 태권도를 그만둘 뻔했다. 태권도로 성공하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부모님의 반대로 태권도를 그만두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러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다시 도장으로 돌아왔다.

6학년 제치고 우승, 두각 나타내
태권도를 시작한 지 4년쯤 됐을때 두각을 나타냈다. 9살 꼬마가 인천에서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 5·6학년 형들을 꺾고 3등을 했다. 6학년이 됐을 때는 문화체육부장관배 태권도대회와 전국어린이태권왕 태권도대회를 재패했다. 그 무렵 자신감이 생겨 국가대표의 꿈을 품었다. 이후 크고 작은 슬럼프를 이겨내며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전국협회장기 단체대항 태권도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줬다. 이후 계명대학교 태권도학과에 진학했다. 장 씨는 “고2 때 우승한 경기를 계기로 자신감이 급상승했다”며 “태권도의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고 덧붙였다.

체급 올려 출전해 국대 선발
대학교에 진학한 장 씨의 성적은 무난했다. 승리와 패배를 겪으면서 한층 더 성장해 갔다. 4학년 무렵에는 국가대표의 꿈에 한발짝 더 다가섰다. 태권도회장기 전국대학대항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대구광역시 수성구청 실업팀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당시 계약금은 2000만 원, 팀 내 최고 연봉이었다. 이후 출전한 경기 마다 메달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같이 훈련 하던 후배가 군입대를 지원하면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공석이 생겼다. 장 선수는 감독의 제안에 따라 한 체급을 올려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권이 걸린 대회에 출전했다. 페더급(-64kg)이었던 그가 라이트급(-68kg)으로 도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보통 체중을 줄여 체급을 낮춰 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선수는 이 경기에서 국가대표 선발전 티켓을 거머줬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장 씨는 “체급을 올리니 상대방의 발이 보였다”며 “나와 비슷한 체중의 선수들과 겨뤄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거운 선수들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 내가 우승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꿈을 이룬 순간의 희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시안게임 앞두고 ‘청천벽력’
아시안게임 일정에 맞춰 태릉선수촌에 들어간 장 씨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두고 어머니가 산에서 낙사했다는 비보였다. 훈련이 없는 주말이면 집으로 가던 장 씨였지만 그날은 훈련이 있었다. 등산이 취미였던 모친은 정상에 오를 때마다 사진을 찍어 장 씨에게 보내곤 했지만 그날은 사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가장 큰 슬럼프를 맞이했다. 당시 방송사 다큐멘터리에서 장 씨를 따라다니며 촬영을 했는데 장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메달을 바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져 갔고, 슬픔을 참아내며 훈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아시안게임에 팀내 주장으로 출전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첫 경기에 만난 선수는 동체급 세계1위 선수였다. 그날 따라 몸도 무거웠다. 결과는 그야말로 참패였다. 12명의 선수 중 10명의 선수가 메달을 땄지만 장 씨는 빈 손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TV를 보는데 고개를 떨군 내 모습이 초라했어요. 만감이 교차했죠. 아시안게임 이후 다음 국가대표 선발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었습니다. 태권도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땔래야 땔 수 없는 태권도와의 인연
태권도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몸은 고됐지만 행복했다. 태권도와 다른 종류의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달도 안돼 태권도가 너무 하고 싶었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신성대학교 태권도경호과를 알게 됐고, 태권도 코치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코치가 된 지 3년 째인 그는 또다른 목표가 생겼다. 교수를 목표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동시에 태권도 체육관을 차리는 것이다. 올해 2학기에는 겨루기지도법, 태권도겨루기 실기 2과목을 직접 강의한다.

“꼭 엘리트가 아니면 어때요. 저도 엘리트가 아니었어요. 학생들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지도자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때 대상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평생 태권도를 하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태권도경호과 한권상 학과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의 태권도 발전을 위해 학생들이 유능한 태권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장경훈 씨는?
-1985년 서산 출생
-정미면 덕마리 거주
-계명대학교 태권도학과 졸업
-전 대구 수성구청 실업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국가대표 주장
-신성대학교 태권도경호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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