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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7.07.16 12:59
  • 호수 1167

박은주 씨 당진시 우두동 거주
황토와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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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게 익은 황토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당진이다. 이곳에 살면서 핏기도는 듯 한 기름진 흙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 붉은 흙을 보면 고구마가 심고 싶다. 왠지 심기만 하면 황토의 붉은 기운이 고구마를 키우고 영글게 할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 어쩌면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게 고구마는 달콤한 간식이면서 잊지 못할 추억이기도 하다. 황토밭에서 자란 우리 집 고구마는 동네에서 제일 맛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다. 그날은 어머니가 부엌에서 유난히 분주했다. 아랫방 댓돌에는 낯선 남자의 구두가 놓여있고 그 반짝거리는 구두 옆에 언니의 신발이 나란히 있었다. 신발 앞에서 기웃거리는 나를 어머니가 손짓으로 불렀다. 삶은 고구마를 내밀면서 방에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문 앞에서 언니를 부르자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웃었다. 언니 옆에 앉으며 조용히 고구마 그릇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오라는 어머니의 당부 때문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언니는 그 남자와 마주 앉아있을 뿐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이 어색한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데 조용했다. 고구마 냄새를 안은 김이 조용한 방에서 혼자 모락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고구마를 잡았다. 내 눈길도 덩달아 남자의 손에 잡힌 고구마에 갔다. 남자는 내 코앞에 고구마를 불쑥 내밀었다. 체할 것 같은 이 자리에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안 먹겠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도움을 청하듯 언니를 쳐다봤다. 엄마처럼 잘 챙겨주던 언니가 그날은 영 이상했다. 새색시처럼 하고 앉아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한마디 해주길 바라며 언니에게 더 바짝 붙었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언니를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는데 남자가 빤히 바라보며 계속 고구마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고구마를 내려놓고 왜 우느냐고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서워 운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더 서럽게 울었다. 언니와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달랬다.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지 않자 당황해 하던 두 사람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내 마음을 몰라주고 웃는 두 사람이 더 얄밉고 서러워 방을 뛰쳐나왔다.

나를 울렸던 그 남자는 큰 형부가 되었다. 그일 이후 형부는 고구마만 보면 어린 처제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형부는 그날 갑자기 맞선을 보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바람에 늦게 일어나 속 풀 시간이 없었다. 시내 어느 다방에서 가볍게 볼 줄 알고 그냥 나왔는데 처녀의 집이라는 말에 술이 확 깨면서 속이 쓰렸다. 여자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옷매무시는 고쳤지만, 속까지는 챙기지 못하고 도착했다.

방에서 여자와 단둘이 있으니 어색해서 불편했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할수록 속은 쓰리고 배가 고팠다. 그때 마침 어린아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가지고 왔다. 삶은 고구마의 냄새가 새삼 반가웠다. 심부름만 하고 나갈 줄 알았던 여자아이가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선자리니 점잖게 먹어야 할 것 같아 먼저 어린아이에게 하나를 주고 먹는 게 보기도 좋을 것 같았다.

여자아이에게 고구마를 내밀었다.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놀라 고구마를 그릇에 놓고 달랬다. 아이의 울음이 더 커졌다. 무엇이 잘못되어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하니 머릿속은 하얘지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아이의 언니를 쳐다보니 그 여자도 얼굴이 발갛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우리의 웃음이 멈추지 않자 울던 아이가 방을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분위기는 확 달라져서 화기애애해졌다고 한다. 내가 울지 않았으면 아마 결혼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속이 아파서 대충 선보고 빨리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형부는 지금도 이야기한다.

그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고구마를 참 좋아한다. 그것도 붉은 황토에서 자란 고구마를 즐겨 먹는다. 요즘같이 더울 때는 고구마가 과일만큼 비싸다. 그래도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고구마가 있다. 당진에 살면서 더 자주 먹게 되었다. 황토에서 자란 고구마를 쉽게 만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에 살면서 소원이 하나 생겼다. 나이를 더 먹으면 손바닥만 한 황토밭을 가지는 것이다. 붉은 흙에서 키운 맛있는 고구마를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당진은 일몰만 보기 좋은 게 아니다. 흙도 꿈도 붉어서 좋다. 고구마처럼 내 꿈도 잘 자라서 붉게 여물 것 같기 때문이다.

>>박은주 씨는
포항 출신으로 2년 째 당진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우두동에 살고 있으며 삼남매 자녀를 둔 엄마이다. 또한 북키스 독서토론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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