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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촛불의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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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역사 산책2

조선을 둘러싼 19세기 후반의 국내외적 정세는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동학에 많은 기대를 걸게 했다. 1890년대부터는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조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동학이 조직적인 확장을 이루어내게 되자 동학도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내몰린 동학도인들은 동학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금구 원평으로 모여 들었다. 이에 동학교단은 동학도인들에 대한 탄압에 대항해 교조 최제우 대선생에 대한 억울한 죽음을 구제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1892년 10월21일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에 의관을 정제한 동학도인 수천 명이 관아로 들어섰다. 서인주, 서병학 등 지도부가 장두가 되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의송단자를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면천에서 유배살던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겨울 초입에 동학당이 충청감영에 일제히 모였는데 무려 만 여명이었다. 원통함을 하소연한다고 핑계를 대었는데, 모인 자들이 모두 의관을 차려 입고 발랑을 멘 채 감영의 성곽에 가득했다. 장두 8명이 포정사 문밖에 엎드린 채 한 달 남짓 물러나지 않았다. 충청도 관찰사가 가게에 엄히 신칙해 밥을 팔지 못하게 하자, 그 무리들은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고는 서로 인솔해 떠났다. 무리를 모아 한 달을 지났지만, 특별히 폐단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모두 두목의 명령을 따라 자못 질서정연했다”고 기록했다. *

실제로는 동학도인들의 교조신원운동의 결과 4일만인 10월 25일에 충청감사 조병식이 각 군현에 감결을 내려 동학도인에 대한 무고한 탄압을 중단하라 명령했다. 이로써 충청감영을 상대로 한 교조신원운동은 대성공을 거뒀고 역사는 이를 공주취회라 부른다. 공주취회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회라고 할 수 있는데, 공주취회를 통해 동학도인들의 단결된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됐다. 공주취회를 본 조선민중들은 충청감사 마저 굴복시킨 동학의 힘에 놀랐으며, 동학을 통한다면 자신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속음청사』, 2016 당진시 고종29년 임진11월17일조 4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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