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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3-28 10:4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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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지역의 문화재를 엿보다 17 채운포 석교비
승려가 만든 채운다리 기념한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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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는 돛단배 오갔던 채운다리
받침돌, 덮개돌 있었지만 행방 묘연
“논산 ‘미내다리’와 같은 모양일 것”

채운포 석교비는 당진시 채운동에서 고대면으로 향하는 615번 지방도로 옆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채 몸돌만 남아있는데 덮개돌이 있었던 흔적은 남아있다. 받침돌은 거북모양의 돌이었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비석 맨 끝부분에 승정기원후 51년(1688)이라고 새겨져 있어 168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8세기 쯤 여지도서에서는 채운교가 13칸 규모의 나무다리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가 여러차례 새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몸돌의 크기는 가로 약 62cm, 세로 154cm, 두께 38cm다. 비석이 세워졌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역천 냇가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됐다. 비석의 앞쪽에는 ‘채운포석교명’이라고 적혀 있어 이 비석이 채운포 돌다리의 건립을 기념해 세워진 것을 알려주지만 아래의 작은 글자들은 거의 알아 볼 수가 없다 . 전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비석에 새겨져 있던 내용을 지우고 다른 누군가의 공에 대한 내용을 적으려 했지만 번개가 쳐서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1937년 편찬된 ‘당진군사’에 따르면 “당진에서 서울가는 길목에 채운교가 있는데 다리모양이 큰 북 모양이었고 그 밑으로 돛단배가 오간다”고 쓰여있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채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1731년 논산시에 건립된 미내다리의 강폭이 채운포 돌다리와 유사했다는 점과 비슷한 전설이 전해지는 등 시기, 강폭, 전설로 미뤄보아 두 다리가 비슷한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좌·우·후면에는 건립 당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절반 정도는 확인이 어렵지만 ‘석수비구’, ‘사주비구’, ‘조역비구’ 등의 글귀를 통해 건립할 때 스님들이 관련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채운포 돌다리가 고대면으로 연결되는 곳이었다는 점과 비석 건립에 승려들이 관여했다는 점으로 보아 영랑사와 관계가 깊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주소 : 채운동 1123(대동다숲 아파트 인근)

※이 기사는 충남도미디어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미니인터뷰 윤성의 향토사학자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채운다리”

“채운다리는 서산의 해미읍성을 보고 놀란 사람이 면천읍성을 보고 감탄을 했으며, 채운다리를 보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였다고 전해집니다. 현재는 많은 부분에 대해 사실 확인이 어렵지만 당진에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습니다. 지붕이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고 받침돌을 원형인 거북모양으로 복원했다면 좋았겠죠. 채운포 석교비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에요. 시민들이 당진 지역의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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