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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14]
보은취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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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취회는 광화문 복합상소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교단의 입장에서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주취회 때부터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제 최종적으로 조정을 압박하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통해 동학 탄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오히려 동학에 대한 탄압의 빌미가 되어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단의 주요 지도자들이 쫓기는 신세를 만든 상황이 되었다.

동학 조직력이 취약했던 시절이었으면 또 다시 도망을 쳤을 테지만, 이제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제 동학의 조직력은 조선 조정이 함부로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기에 동학의 대도소가 있던 보은 장내리에 전국의 동학도인들이 모여 조정의 탄압에 맞섰다. 이것이 바로 조선 역사 최초의 민회였던 보은취회의 시작이다.

1893년 3월11일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동학도인들은 무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민회를 이어갔다. 보은취회에서는 더 이상 교조 최제우의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대신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왜양창의’라는 신분적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조선민중이 공감할 수 있는 구호를 내 걸었다. 그런 까닭에 보은취회에는 동학도인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많은 농민들이 함께할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시대적 요구에 공감한 조선민중들이 동학도인들을 따라 보은 장내리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보은취회를 기록한 『취어』를 보면 “마침내 재주와 기상을 믿었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고… 농사를 지어도 곡식을 남기지 못하고 장사를 하여도 이익을 남기지 못한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어리석고 우매하여 소문만 듣고 동학에 들어간 것을 즐겁게 여기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빚을 져 독촉을 이겨내지 못하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상민과 천민이 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들을 따랐습니다”라고 하여 보은취회에 참석한 조선민중의 면면을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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