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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으로추억속으로] 우강면 창리 김응태 씨
배움은 나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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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가 8남3녀였는데, 남형제 중엔 내가 맏이였다. 어릴 적 누나와 나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한 초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께 입학시켜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결국엔 학교 대신 10세 때 글방(서당)을 다니게 됐다. 이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내 동생들은 모두 학교를 다녔다. 벼슬이었던 할아버지 덕에 나는 배고픔 없이 자랐다. 당시 보리밥도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쌀밥을 먹고 자랐다.

요즘 나는 컴퓨터 시험을 앞두고 있어 바쁘다. 오는 10월 건양대학교에서 IT경진대회가 있어 준비하고 있다. 2014년 6월에 당진정보고에서 ITQ(국가공인 정보기술자격시험)를 봤다. 단번에 붙어 자격증도 취득했다. 옛날엔 컴퓨터가 없고 타자기가 있었다. 그 다음 전동 타자기가 나왔는데 자판 배열이 지금의 컴퓨터와 똑같다. 그래서 배우기엔 어려움이 없다.
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좋다. 당진시 전통민요보존회에서도 장구도 배우고 있고, 또 집에서는 난타연습도 한다. 난 앞으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며 살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아내 곽호분과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김수로 왕릉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의 고향은 아산시 선장면으로, 중매로 만나 군 제대 후 내 나이 26세에 결혼했다. 아내는 내가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편이라고 한다. 가끔은 밥도 해놓곤 한다. 손녀 소희가 전화해선 할머니를 많이 도와달라고 늘 이야기한다.

두 번째 사진은 2002년 경 합덕대건노인대학 졸업식 날 찍은 사진이다.
둘째 아들과 찍었다. 이때가 내게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여기서는 총학생회장도 여러 번 맡았다. 젊은 시절 나는 아버지를 도우면서 벼농사를 지었고, 이후엔 합덕읍 운산리에 위치한 신의균법무사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10년 간 일했다.

세 번째 사진은 2004년 아내와 가수 남진 공연을 관람한 뒤 찍은 사진이다.
이때 남진이 당진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진 노래는 할 줄 몰라도 남진은 좋아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남진을 좋아한다. 둘째 아들의 친구인 이광주가 남진 등과 인연이 있어 사진을 찍을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줬다.

네 번째 사진은 나와 아내, 어머니, 큰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다.
집안 행사가 있었을 때 찍은 사진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속 갓난아기가 손자 보겸이다.

마지막 사진은 손자 보겸이가 어릴 적 유치원에서 놀러갔을 때 따라가서 찍은 사진이다.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아이가 손자 보겸이다. 이때 학부모가 아이와 함께 가는 소풍이었는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손주를 아내와 내가 키웠다. 당시 맞벌이하는 큰 아들 내외는 직장에 가고, 대신해서 아내와 내가 대신 다녀왔다. 내게는 소희와 보겸이라는 손주 두 명이 있다. 소희는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진학해 얼마 전 미국 유학을 갔다 귀국했다. 보겸이는 올 11월 군 제대를 앞두고 있다. 아내가 손주를 정성들여 키웠다. 아이들도 우리를 좋아한다. 지금도 안부 전화를 자주 하곤 한다. 어릴 적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서인지 서로가 특별하다.
얼마 전에는 ‘소희의 귀국을 축하한다’는 플랜카드를 만들어 거실에 걸었다. 작은 이벤트였지만 소희가 너무 좋아해 기뻤다. 곧 전역할 보겸이를 위해서도 이벤트를 준비할 계획이다.
 

김응태 (오른쪽)
우강면 창리>> 김응태 씨는
·1937년 합덕읍 합덕리 출생
   (현 81세) 
·현 우강면 창리 거주 
·현 당진시 전통민요보존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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