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스스로 운명을 바꾼 조선민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은취회가 끝난 이후 조선의 정국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자주적인 개방과 개혁정책은 청국의 간섭으로 좌절됐고, 조선의 주권을 노리던 일본은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조선의 관리들은 나라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부정과 부패에 찌든 탐관오리가 되어 제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조선민중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현실의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기에 착취와 수탈을 거부하고 맞서지 않는 한 거리를 떠돌며 유리걸식하거나 동학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893년 계사년이 막 저물던 1893년 겨울 12월14일 내포지방을 대표하는 합덕농민들이 봉기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합덕방죽을 둘러싸고 합덕농민 수천명이 연제 수리계장을 하며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던 전 전라병사 이정규의 집을 불사르고 징치한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894년 갑오년 1월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수천의 농민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합덕농민들의 봉기는 이정규에게 죄를 물어 유배 보내고, 농민 대표들에게 가벼운 책임을 묻는 것으로 무마됐다. 하지만 고부농민봉기는 간단하지 않았다. 고부농민들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고부군수로 새로 부임한 박원명의 노력으로 사태가 수습돼 가던 중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고부농민의 분노를 가볍게 보고 책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잡아 가두고 부녀자를 능욕하며 재산을 약탈하는 등 고부농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에 안핵사 이용태의 체포령을 피해 무장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고창의 대접주 손화중과 연합해 3월20일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에서 백산으로 이동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에 해당하는 ‘동도대장’으로 삼아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대접주 등과 함께 불평등과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고부에 한정된 농민들이 아니었다.

조선조정과 전면전을 불사하고 모인 동학농민군이었던 것이다.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모두 흰 옷에 죽창을 들었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멀리서 보면 농민군들의 모습이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으로 보였다고 한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