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말이 없다. 답답하다. 그 아이는 흑인이다! 가난하고 아버지도 없는데다 엄마는 마약에 빠져있다. ‘샤이런’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으나 학교 아이들은 그를 ‘리틀’이라고 부른다. 리틀이라는 별명이 그가 흑인 사회에서도 약자임을 나타낸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방치하는 엄마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 대한 리틀의 심적인 혼란과 방황을 말해주는 듯 화면은 흔들리고 초점이 자주 흐려진다. 배경은 축소되고 인물은 확대되는데, 인물을 비추는 샷이 불안정하다.
영화는 말이 아닌 카메라의 앵글과 초점, 음의 소거 같은 영화적 기법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과 심리를 관객의 감각에 전달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리틀이 아이들의 괴롭힘에 쫓겨 도망가다 만난 마약 판매상인 후안에게서 수영을 배우는 장면이다.
목 위를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는 수면에 시점을 두어 관객도 같이 물속에서 출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데, 그것은 마치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대한 바다의 한 가운데서 간신히 목만 내민 채 허우적거리는 것이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약골이던 리틀은 성인이 되어 번쩍이는 금 틀니를 끼우고 총을 숨기고 있는 근육질의 마약 판매상 ‘블랙’이 된다. 이것은 그의 삶의 굴레가 강제한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두 사람 즉, 그에게 다가와 용기를 주고 성적 떨림을 갖게 해 준 친구인 케빈이 그를 블랙이라고 불렀고, 그에게 도피처이자 잠깐이나마 아버지 역할을 해 준 후안이 마약 판매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리틀이 아닌 샤이런이고자 했던 청소년기에 주변은 그를 샤이런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약에 절어 돈을 요구하는 엄마는 가혹하고, 유일한 친구인 케빈으로 하여금 그를 폭행하도록 하는 학교친구들은 야비하기 짝이 없다. 그런 야비한 짓에 대한 샤이런의 복수를 소년원으로 갚는 공권력은 부조리하다. 샤이런이 블랙이 된 것은 샤이런의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리틀에서 샤이런을 거쳐 블랙에 이르는, 흑인이면서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으며 왕따이고 게이인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한 인간의 삶을 별 수사 없이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고 바싹 쫓아가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가다보면 처음엔 불안하고 이내 불편하다가 결국엔 애잔해진다.
그래서 말하고 싶어진다. 흑인이어도 괜찮다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블랙의 머리를 쓰다듬는 마지막 장면의 케빈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난해도 괜찮고 게이여도 괜찮다고, 그래서 이제 울지 말고 웃으라고!
김현정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