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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충청 농민, 힘을 모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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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전라도지방에서 문제가 생겼다. 전봉준과 손화중 등은 최시형의 기포령이 결정되기 전에 동학농민군의 재봉기가 불가피함을 알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전주 바로 옆 삼례에 창의도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이 삼례에 창의도의소를 설치한 이유는 전라도지방 동학농민군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반영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전봉준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동학농민군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전라도 일대의 사림에 기대를 걸고 격문을 돌려 항일전선에 함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라와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여 항일전선에 함께할 것으로 기대했던 유림세력은 누구하나 함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북상을 늦춘 채 군사가 모이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오직 전라감사 김학진이 운량관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삼례에서 모은 농민군 4000명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삼례에서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함열을 거쳐 강경에 이르러 전 여산부사 김원식이 합류하여 세력을 키웠다. 10월 12일에는 드디어 논산에 도착하였는데 공주 유생 이유상이 합류하였다. 이유상은 정산 출신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하여 격문을 돌리고 공주에서 창의하였다.

이유상의 창의에 따라 공주, 논산, 정산 일대의 유생들과 농민군 5천명이 모였고,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하자 논산에서 합류한 것이다. 이렇게 논산에 모인 군사가 1만이 되었으니 그 중 반이 넘는 인원은 충청도의 농민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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