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이기정 할머니 별세

당진 최초 시민장(市民葬) 치러
전국 생존 위안부 피해자 33명 뿐
임아연l승인2017.11.25 10:00l(1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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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 이기정 할머니가 향년 94세(만93세)의 나이로 지난 11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송산면 오도리에 거주하던 이기정 할머니는 충남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였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폐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최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의 빈소는 당진장례식장에 마련돼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으며, 당진시 최초로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할머니가 별세한 첫날 김홍장 당진시장은 이종윤 당진시의회 의장과 긴급협의해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안희정 도지사와 윤석우 충남도의회 의장이 고문을, 김홍장 당진시장, 이종윤 당진시의장, 어기구 국회의원과 당진평화의소녀상 기념사업회 이명남 상임대표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이밖에 당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던 당진어울림여성회(회장 김진숙), 당진시여성단체협의회(회장 안임숙) 등 시민사회 대표들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한편 지난 11일 저녁 당진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당진시대와의 인터뷰를 통해 “충남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계셨던 이기정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면서 “할머니의 인생을,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며 반인륜적인 범죄를 자행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할머니에 대한 도리”라고 말했다. 이어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준 당진시민들에게 감사하다”며 “210만 충남도민들이 유족된 마음으로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기정 할머니의 영결식은 지난 13일 오전 당진시청 앞에서 엄수됐다. 이후 당진버스터미널 앞에 세워진 당진 평화의 소녀상과 송산면 오도리 자택을 방문한 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됐다.

“굴곡진 인생…이제 편안히 눈 감으소서”

간호사 모집한다는 얘기 듣고 끌려가

위문방문부터 평화의 소녀상 건립까지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시절, 당시 19살이었던 이기정 할머니는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간호사가 되는 줄 알고 따라간 곳에서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모진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군인들의 강제인솔에 이끌려 싱가포르 일본군 부대에 도착한 할머니는 미얀마(버마)까지 군인들을 따라 이동했다.

당시 할머니는 탈출을 시도했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발각돼 매질을 당하거나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고향(수청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후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해, 일찍 생을 마감한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아들이 낳은 딸을 자신이 낳은 딸처럼 정성을 다해 길렀다. 오래 전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기정 할머니의 빈소는 할머니가 키운 딸과 조카들, 마을 주민들이 상주로 자리를 지켰다.

한편 이기정 할머니가 당진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진시 여성가족과와 당진시여성단체협의회(회장 안임숙), 당진어울림여성회(회장 김진숙)를 비롯해 지역사회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전해 왔다. 또한 당진평화의소녀상 기념사업회(상임대표 이명남)에서는 지난해 1029명의 시민과 34개의 시민사회단체의 힘을 모아 당진 평화의 소녀상을 당진버스터미널 광장에 건립하고 평화나비기행 등을 진행했다.

이밖에 당진지역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당진청소년평화나비에서는 지난 8월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평화나비 페스타’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기정 할머니 추모 물결 이어져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장관·당대표 등 조화 보내
정백현 여가부 장관 및 외교부 차관 빈소 찾아와 조문
기사 보고 온 일반 시민 및 학생들까지 발걸음

충남지역의 마지막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기정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곳곳에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조화가 도착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정세균 국회의장이 조화를 보냈으며,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조화도 도착했다. 이밖에 강경화 외교부장관, 정백현 여성가족부장관, 김상곤 사회부총리겸 교육부장관 등의 조화와 다수의 국회의원이 보낸 조화 및 근조기도 장례식장 한편에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동북아역사재단, 정의기억재단, 마리몬드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기관 및 단체에서도 조화를 보냈으며, 당진지역 내 수많은 기관·단체에서도 조화를 통해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한편 지난 11일 저녁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빈소를 찾아 조문한 데 이어, 같은 날 저녁에는 조현 외교부 차관이 방문했다. 장례 이튿날인 12일에는 이숙진 여성가족부 차관과 정백현 여성가족부 장관이 차례로 조문했으며,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과 양승조 국회의원이 발걸음 했다.

한편 지역사회 정재계 인사의 조문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김홍장 당진시장과 어기구 국회의원, 이종윤 당진시의회 의장 및 시의원 등이 수차례 빈소를 찾았으며, 이밖에 여러 시민사회단체와 일반시민들이 개별적으로 빈소를 방문해 이기정 할머니의 영면을 기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기사를 보고 이기정 할머니의 부음소식을 들었다는 신평고등학교 2학년 조건희 학생은 “친구들에게 알리고 함께 빈소를 찾게 됐다”며 “당진에 살고 계셨다는 사실도 모르고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뵙게 돼 죄송한 마음”이라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터미널 광장에 분향소 설치

“할머니 애도하며 역사 되새기길”

당진시여성단체협의회(회장 안임숙, 이하 당진여협)가 故 이기정 할머니의 분향소를 당진버스터미널 앞 평화의 소녀상 근처에 설치하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지난 13일 설치된 분향소는 14일까지 이틀 간 운영됐으며, 당진여협, 당진참여연대(회장 이한복) 소속 회원들이 밤새 분향소를 지켰다.

당진여협 안임숙 회장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 평생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신 이기정 할머니를 추모하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시민들에게 역사를 알리고자 분향소를 설치하게 됐다”며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참혹했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게 후손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12일 당진장례식장 빈소를 방문한 정백현 여성가족부 장관은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시민장을 치르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무척 감사하다”면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여성단체협의회가 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코자 한 것 역시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기정 할머니와 함께한 송산면 오도리 주민들
"다시 태어나면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할머니, 다시 태어나면 평생 마음 아팠던 그런 일 겪지 마시고, 좋은 세상에서, 시집 잘 가서, 행복한 가정 이루고 사시길 바라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세요.” (송산면 오도리 주민 김금자 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송산면 오도리에 살았던 이기정 할머니를 보내는 시민들의 마음이 조문 행렬로 이어졌다. 일본군에 끌려 갔다 해방 이후 할머니는 당진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집이 있는 수청리로 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정착한 곳은 송산면 오도리. 주민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살뜰히 할머니를 챙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상주 노릇을 하며 빈소를 지키고, 조문객들을 맞이한 것도 주민들이었다.

최충균 이장은, 살아 생전 경로당에 오는 것조차 남부끄러워하던 이기정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우리의 보물”이라며 할머니를 위로하곤 했다. 40년 이상 이웃에 살면서 지난 10여 년 간 도우미로 일하며 할머니 곁을 지킨 손연예(78) 씨 역시 이기정 할머니에겐 딸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난 11일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도 손 씨다.
그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할머니 가슴팍이 따뜻했다”며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편안하게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할머니는 인정 많고 베풀 줄 아는 착한 사람이었다”면서 “이웃들이 할머니가 외롭지 않게 늘 관심을 갖고 함께 돌봐줘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빈소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김영란 부녀회장은 “아픈 역사의 희생자였던 할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바(일본의 사과)를 보지 못하고 떠나셔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면서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시길 바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아연  zelkova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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