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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26]
동학농민군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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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점령하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진격은 우금티에서 가로막혔다. 호남과 호중에서 모인 동학농민군은 10월23일 이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경군을 물리치고 곧바로 우금티 앞에 도달하였다. 이제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는 동학농민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에게 불운했던 것은 공주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을 사방에서 압박하여 흩어 놓으려 했던 작전이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세성산의 천안, 목천의 동학군이 10월21일에 장위영군에 패하였고, 옥천 영동의 호중 동학농민군이 10월24일 공주 대교전투에서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에 패하였으며, 10월28일 내포의 동학군이 홍주성에서 패하였고, 여기에 남원에 웅거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던 김개남군이 금산을 거쳐 청주로 향했는데 역시 청주병영 공격에 실패하여 패퇴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오직 우금티만 지키면 되는 형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우금티를 앞에 두고 동학농민군을 사열하였다. 무려 3만 명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포위하여 총 공격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에 끝내 효포와 능티를 넘지 못하고 논산으로 후퇴하였다. 논산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11월8일 다시 한 번 이인을 거쳐 우금티를 넘고자 했다. 11월9일부터 4일간 벌어진 전투는 하루 4~50차례나 이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양호도순무영 통위영 영관이자 좌선봉 이규태는 『선봉진일기』에서 우금티를 향해 진격하던 동학농민군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왔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리와 무슨 담략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그 때 그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니 생각만 해도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끝내 우금티를 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후퇴하자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뒤쫓아 철저하게 학살을 감행하였다. 논산 황화대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11월27일 원평 구미란 전투를 끝으로 후일을 기약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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