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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영 당진향교 전교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소중한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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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리에서 태어난 나는 1950년 대에 대호지면 마중리로 이사왔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집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정진흥)를 모신 집으로,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겨있는 집이다. 나는 젊은 시절 당진군청에서 근무했으며 지금은 당진향교에서 전교를 맡고 있다.

유림생활부터 수석장의, 성균관 유도회 당진지부회장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전교로 취임했다. 당진향교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강조하며 충효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해는 당진초등학교 전학년을 대상으로 충효교실을 운영했으며, 새해에는 향교에서 사서(대하·논어·맹자·중용)와 삼경(시경·서경·주역)반을 만들 예정이다. 또한 명륜교실과 서예교실, 한문기초반, 도덕예절반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한편 난 옛 사진을 자주 찾아보진 못한다. 사진을 잘 정리해서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 사진은 추억이 되는 것 같다. 태국에서 전갈을 몸에 붙이고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때 생각이 생생하게 기억나더라.

첫 번째 사진은 막내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다.
막내아들이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사진 속에는 막내아들이 없다.
나는 1962년 2월24일 22세의 나이에 정미면 매방리 출신의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나보다 3살 연상이었다. 당시 나는 일찍 결혼한 거였는데, 그때 할아버지의 소원이 내가 결혼해 손주를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한 지 10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간절히 원해서 그런지, 임신이 잘 되지 않았다. 어렵게 우리는 큰딸 정숙이를 낳고, 5년 후 큰아들 상용이를, 또 5년 후 막내아들 상범이를 낳았다. 현재 큰딸은 강원도 철원에 살고 있고 두 아들은 당진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당진군청에 근무했을 때 찍힌 사진이다.
나는 1970년부터 당진군청에서 일했다. 10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돼 1999년 6월까지 근무하다, 퇴임했다. 당시 나는 새마을 사업, 전국공원화 사업을 맡았다가, 민원계장과 공보계장, 새마을계장을 맡았다. 이때쯤 새마을문고 당진지부장도 했었는데 당시 내무부장관상도 수상했다.

세 번째 사진은 두 아들과 여행가서 찍은 사진이다.
현재 아내가 몸이 불편해, 큰아들 상용이가 집에 와서 식사를 챙겨주는 등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나는 늘 자녀들을 보면 고맙다. 앞으로도 본인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아줬으면 한다.

네 번째 사진은 지난해 당진향교 전교로 취임했을 때 찍힌 사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진향교에서 9년간 장의를 하셨고, 성균관 유도회 당진지부회장을 하셨던 분의 권유로 2005년부터 9년간 당진향교 수석장의를 하게 됐다. 이후 순차적인 절차를 거쳐 성균관 유도회 당진지부회장을 지내고 전교를 맡게 됐다. 향교에서 사무국장, 지부회장 등을 맡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막중한 일이라 선·후배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항상 조심스런 마음으로 타인에게 피해되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나의 인생목표다.

>>정덕영 전교는
·1941년 원당동 출생
·전 서울초단파전신전화건설국 양산중개소 근무
·전 당진군청 근무
·전 행정동우회 사무국장
·전 당진향교 사무국장
·전 새마을문고 당진지부장
·전 성균관유도회 당진지부회장
·현 당진향교 전교(2017~)
·현 대호지면 마중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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