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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08.14 17:44
  • 호수 1219

신암사의 역사·문화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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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현 당진시 문화관광과 문화재팀장

신암사는 고려 충숙왕(14세기 초) 때 문신 구예(具藝)의 아내 아주신 씨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지은 문중 사찰이다. 구예는 1317년(충숙왕 17) 구재삭시(九齋朔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중대광 판전의시사(重大匡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면주(沔州)<면천>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면성 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중대광 판전의시사는 고려초 16등급 중 1등급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시로하여 왕실사찰과 귀족사찰을 다수 건립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정책인 도첩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승려환속 유도 등 불교 탄압으로 문중사찰들이 사라졌고, 일제 강점기에도 식민통치정책인 내선일체라는 미명아래 사찰령을 공포(1911)하여 31본산체제로 정비하는 등 민족종교인 불교를 탄압하며 문중사찰의 씨를 말렸다. 그러나 신암사는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문중사찰로 남아 있고, 이러한 예는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신암사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고려시대의 문화유산과 조선시대의 문화유산이 혼재해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문화 유산(대웅전과 금동여래좌상, 7층석탑, 산신각)과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유산(구예 묘지석, 제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능성구씨들은 왜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문중사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것은 가문의 근원에 대한 뿌리의식,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가통에 대한 자부심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한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사회 주류, 조선시대에 수많은 사마시 합격자를 내며 문벌을 형성하였고 근래에는 L.G라는 거대그룹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조선시대와 일제감정기 불교탄압속에서 문중신앙의 전통을 이어왔고 현재에도 막대한 자본으로 절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유명한 스님을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 조선 전기의 학자 백담 구봉령의 제문은 신암사가 현재에도 왜 문중사찰로 존재하고 있는지 조금의 궁금증은 풀 수 있다.

 

백담집 제9권 / 제문(祭文)

능성선조 고비묘 입석 고유문
〔綾城先祖考妣墓立石告文〕

거친 풀을 베어 내고 / 剗剔荒翳
겨우 띠풀만 개수하고 / 僅迺改脩
묘도에 비를 세우는 것은 / 鐫豐賁隧
힘이 미치지 못했네 / 力未及周
돌아보건대 묘의가 빠짐은 / 顧闕墓儀
후손의 부끄러움이니 / 豈非後羞
이에 좋은 돌을 깎아서 / 玆斲雲根
귀부와 이두를 만듭니다 / 龜趺螭頭
계차를 밝게 기록하여 / 昭載系次
천추토록 영원히 보이며 / 永揭千秋
채소와 술을 올리며 / 山蔬浻酌
그 연유를 고하나이다 / 以告厥由

 

백담집 제9권 / 제문(祭文)

면성부원군 묘소에 올린 제문〔祭沔城府院君墓文〕

멀리 생각건대 선령께서는 / 緬惟先靈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 早擢巍科
당당히 청운의 길에 올라 / 步武靑雲
문장으로 나라를 빛냈네 / 騫耀摛華
능성을 통해 면성을 시작하니 / 由綾肇沔
그 가문을 크게 떨쳤고 / 大振厥家
삼공의 지위에 올라 / 秩躋鉉台
공훈은 산하를 두고 맹세했네 / 勳誓山河
부인의 덕이 경사를 모으니 / 媲德鍾慶
자손이 상서로움 받아 / 子姓徵祥
높은 관직 대대로 이어지고 / 簪纓繼世
벼슬아치 고을을 이었네 / 冠蓋連鄕
이 큰 언덕은 / 繄玆大麓
두건과 신을 모신 곳이요 / 巾履所藏
한 구역 안개와 노을 속에 / 一區煙霞
세월이 유구하구나 / 歲月其長
덤불 베고 풀을 베어 / 披榛剔翳
묘소를 보수하고 / 改營斧封
공을 새겨 후손에 알리니 / 鐫豐詔後
일을 마치게 되었네 / 事克有終
하물며 성은을 입어 / 矧荷天寵
종손이 관찰사 되었고 / 宗裔按節
또한 막부의 부월 차고 / 亦越幕官
함께 와 참배하였네 / 同來祗謁
정성과 공경을 다해 / 致誠竭虔
전에 못했던 것 마련하여 / 得辦前缺
묘소를 다시 새롭게 하니 / 塋兆重新
초목도 생기가 도는구나 / 草木增色
돌아보니 이 몸은 / 顧惟不肖
외람되이 못난 후손으로 / 忝備孱孫
영해에 떠돌아 다니다니 / 嶺海飄流
가문을 잇는 것 어찌 논하리오 / 克家寧論
일찍 지도를 살펴보고 / 嘗稽圖誌
멀리서 바라보며 슬퍼하였으며 / 遠睇傷魂
을축년 성은을 입어 / 乙丑承恩
변변찮은 음식 두루 올렸었네 / 歷薦蘋蘩
지금 다행히 다시 와서 / 今幸再至
언덕을 우러러 보고 / 景仰丘林
같은 문중 함께 모여 / 同門共會
기쁨의 눈물 옷깃 적시네 / 喜淚交襟
채소와 술을 마련하여 / 山菲浻酌
작은 정성을 다 하오니 / 用罄微忱
가득히 소리 들리시면 / 愾然聞聲
부디 밝게 흠향하소서 / 願賜昭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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