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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08.20 21:28
  • 호수 1220

유병기면천농협 상무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면천(沔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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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부(匹夫)가 태어나고 자란 면천(沔川)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다. 혹자는 면천이 아미산(峨嵋山)과 몽산(夢山), 다불산(多佛山)이 있다 해도 전국의 청풍명월이라고 자부하는 지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나 의구심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필부가 말하는 청풍명월은 경치가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다른 뜻을 말하고 있다. 국어사전에 청풍명월의 해석으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을 평하여 이르는 말’ 이외도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사를 비판함을 비유하는 말’로 그 뜻을 전하고 있다. 필부가 면천을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의 해석 때문이다.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저서 ‘한국인의 민속문화’에서 유청풍(兪淸風)과 박명월(朴明月)에 대한 소개를 한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성종(成宗)때 서울의 사반 사회에 유생(兪生)이라는 선비와 박생(朴生)이라는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비가 있었다. 유생은 이따금 책을 끼고 불쑥 대궐 안에 들어가 신하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곤 했다. 그래서 그 우스갯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기 마련인데 항상 야릇한 여운이 남았다. 그 우스갯소리란 것이 모두 조정의 허물이나 시사 풍자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 무렵 박생(朴生)도 시사 풍자 만담으로 시정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므로 유생과 박생은 세상을 웃음으로 우회시키는 비평가로서 소문 나 있었다. 그리고 각기 그 정자를 짓고 있어 그들의 즐거운 비평을 듣고자 사람들이 그 정자에 몰려가서는 맘껏 웃고 또 통쾌해 하곤 했다. 일종의 신문적 기능을 이 정자가 대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생(兪生)의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했고, 박생(朴生)의 정자를 명월정(明月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유청풍(兪淸風), 박명월(朴明月)로 속칭되었으며, 이들의 아호를 묵어 우스갯짓이나 광대놀음 등으로 시사를 풍자하는 행위를 ‘청풍명월(淸風明月)’한다고들 개념화하였다. 성종, 연산조의 신어(新語)인 이 ‘청풍명월’은 한국인의 저항적 행동 방식의 한 유형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신문전사적(新聞前史的)한 현상으로 주목받는 습속이기도 하다고 전하며 청풍명월(淸風明月)에 대한 소개를 한다.

  앞글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했지만, 이 두 분의 이름은 유승탄(兪承坦)과 박양(朴陽)이다. 면천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계유씨(杞溪兪氏) 동정공파(同正公派)와 밀양박씨(密陽朴氏) 호군공파(護軍公派)의 낙향조(落鄕祖)이기도 하다.

  또한 이보다 앞서 두 분에 대한 일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인 남효온(南孝溫)이 시화(詩話), 일사(逸事)들을 모아 역은 한문수필집 추강냉화(秋江冷話)에 기록이 전해져서이다. 그 내용을 보면 ‘유승탄(兪承坦)은 면천(沔川)사람이다. 책을 끼고 대궐에 이르러 자신이 배운 바를 수천 여 글자에 담아 상소를 올렸다. 모두 조정의 병폐를 적실하게 지적한 것이었지만, 사림들은 모여 소리 내어 비웃었다. 유생(兪生)은 일찍이 자신의 정자를 ‘청풍(淸風)’이라 이름 붙였고, 그의 벗 박생(朴生)은 자신의 서재를 ‘명월(明月)’이라 편액하였다. 높은 벼슬아치들 사이에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 청풍(兪淸風), 박 명월(朴明月)’이라며 비웃고 헐뜯었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쓰이지 못했고, 또한 벼슬을 구할 마음을 두지도 않았다.(출처-추강집, 정출헌 옮김, 한국고전번역원)’으로 두 분을 세상에 알렸다.

앞서 말했듯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이란 말은 경치가 수려한 곳을 가리키기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곳저곳을 사랑(채)으로 불려 다니며 직업적으로 시사문제에 대한 해학하고 다니는 입담꾼과 판소리꾼을 지칭하는 말로 유청풍(兪淸風)과 박명월(朴明月)을 합쳐서 부르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필부가 면천(沔川)을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앞서 말한 것은 이 두 분께서 분명 면천인(沔川人)이기 때문이다.

 유청풍과 박명월은 면천에서 사시면서 청풍명월인(淸風明月人)으로 당대의 폐단을 지적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로 뜻을 같이 하시고, 때론 전국을 유람하며 돈독한 정(情)을 나누며 사셨다. 그러니 두 분이 정착하여 평생을 사신 면천(沔川)을 당연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 청풍명월인들의 메카(Mecca)라 할 것이다.

 그 외 두 분의 일화중 하나를 소개하면 두분이 술을 좋아 하셨는데, 두분이 만나실 때면 줄곧 유청풍은 안주로 두부를 가져오고 박명월은 술을 가져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후로 후손들 사이에서 생긴 말이 유두부박탁주(兪豆腐朴濁酒)이다. 지금도 밀양박씨 친우와 술을 할때면 술값은 네가 내고 안주 값은 내가 내는 것이 조상님 방식이라고 농(弄)을 하곤 한다.(유승탄은 필부에게 21代祖이다.

수년 전 명절 때면 텔레비전에서 마당극을 보여주었다.
마당극에서 청풍명월인(淸風明月人)들이 나와 정치폐단이나 서민의 애환, 시대의 아픔을 해학과 풍자로 관객을 웃고 울리던 것을 필부도 좋아 하였다, 면천은 당진 내에서 많은 문화 유적을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읍성을 복원 중에 있다. 읍성, 저자거리, 동헌, 객사 등이 복원되면 청풍명월인들이 모여 유청풍, 박명월의 고장에서 마당극 한번 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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