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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09.02 18:36
  • 호수 1222

[기고]이종미 수필가
줄에 거는 소망, 기지시 줄다리기 - 당진별곡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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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잡은 줄이 팽팽해질수록 구경꾼의 몸은 뒤로 눕는다. 질긴 것이 동아줄이라지만 수 백 명의 함성에 놀란 그도 정신 줄 놓고 두 동강 날 수 있는 것. 한낮의 태양도 날선 빛살을 감추고 편장의 지휘에 호흡을 같이한다.

약 30년 전쯤의 일이다. 대전에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당진으로 향하던 중 삽교천을 경유한 버스가 아주 조그만 마을에서 덜컥 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목적지인 당진차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컴컴한 밤에 그랬다. ‘혹시 자동차가 고장 났나’ 싶어 걱정 하던 중, 운전기사가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기지시에서 내리실 분을 찾았다. 그 때 난 당진읍이 기지시에 속하는 하위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 후 당진에서 천안으로 가던 중 버스가 또 기지시라는 곳에 정차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시(市) 단위 도시라기에는 차부밖에 뵈지 않는 초라한 마을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다니. 어딘가에 큰 백화점이나 상가가 있을 듯싶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목적지를 바꿔 그들을 따라갔다. 찻길 옆 좁은 인도를 따라가자 출입구가 망가져 이용하기 불편해 뵈는 지하도가 나타났다. 과거에 번화했다던 아테네 거리의 흑백 사진이 오버랩 됐다. ‘이 좁은 도시에 지하도가 있다니, 역시 기지시는 도시임에 틀림없어.’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 한 참을 걸었다. 어떤 다리 밑을 통과하자 논길이 나왔다. 피리 부는 사람을 따라가는 소녀 같아 불안했지만 진정과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계속 따라갔다. 귀신에 홀린 듯 수많은 사람들이 목을 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게다.

 잠시 후 요란한 함성과 함께 풍악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내 평생 처음 본 어마어마하게 굵고 긴 줄이 끌려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충청남도 사람들 다 집합시켰는지 사람의 행렬도 끝없이 이어졌다. 그날이 마침 기지시 줄다리기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정말 우연히 5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적인 현장에 내가 서 있었다. 게다가 기지시라는 지명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지역주민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198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받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속축제가 되었다. 2011년 4월에는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을 개관하여 유물전시와 현장체험을 적절히 조화, 발전시킬 수 있는 보금자리도 마련하였다. 그 결과 2015년 12월에는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종목’ 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대표로 등재되었다.

언 듯 보면 줄다리기의 목적과 묘미가 이기고 지는 승패에 있는 듯 싶다. 수줄인 수상(水上)마을이 이기면 그 해가 평안하고, 암줄인 수하(水下)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선조들의 첫 마음을 이해하면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첫째도 둘째도 화합과 번영이다. 너와 나 우리를 상처 내는 악한 기운은 줄을 잡고 ‘으여차!’ 일어나는 순간 다 날려버리고, 우리 함께 잘 살아보자고 덕을 얹어주는 그런 게임인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 이긴들 무슨 상관있을까.

대부분의 지역축제장에 가면 그 지역 특산물을 자랑하고 한밑천 챙기려는 장삿속 이미지가 부각될 때가 있다. 또한 축제장마다 제목만 다르지 체험 장 모습이 다 비슷하여 감동 없이 발길을 돌릴 때도 있다. 하지만 기지시 줄다리기는 준비과정부터 연출력이나 주민동원력은 물론 화합하는 모습까지 다른 지역 축제와는 확실히 다른 점을 발견할 것이다. 지역민만 참여하는 축제가 아니다. 전국민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축제라는 점도 강점이다.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곁줄을 잡든, 젖줄을 잡든 누구든 곧바로 줄다리기에 참여할 수 있어 울컥 주인의식마저 든다.

 기지시 줄다리기가 남북평화통일의 매개체이면서 어려움을 풀어내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줄다리기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행해졌던 만큼 북한에서도 성행했을 것이다. 남북 대표가 테이블에 앉아 긴밀한 대화를 나누다가 뭔가 막힌다 싶으면 ‘우리 기지시 가서 줄이나 한 판 당기세’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과거 독설과 전쟁을 운운하며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판들 나오는 것은 한숨과 눈물 밖에 더 있었던가. 나 같은 정치 문외한이 정확한 대책을 어찌 낼 수 있을까. 정치전문가와 평화관련자들이 이마와 무릎을 맞대고 ‘남북 평화통일 기지시줄다리기’를 심사숙고 했으면 좋겠다.

 남북 평화무드가 푸르른 보리밭처럼 짙어오는 요즘, ‘틀못’이 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침략 속에서도 한반도 전체를 누비던 때가 있었는데, 그동안 묵만 빼고 기다렸던 시간이 다가왔다. 북쪽 땅을 밟을 수 있는 희망을 품고 가슴 떨려 쉬 잠이 올까. 두만강에 머리 두고 삼팔선에 허리를 대고 굽은 허리 펼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했을 텐데. 남북이 겨룰 것은 핵무기나 총이 아닌 ‘기지시 줄다리기’임을 얼마나 알리고 싶었을까. 함께 줄장난칠 그 날이 코앞에 왔음을 직감하고 까치발 서고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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