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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지
  • 입력 2018.09.22 10:33
  • 호수 1225

“얼마나 포기해야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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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공부도 사치…비정규직으로 생계 이어와
연이은 다리 골절로 생계까지 지장…하루하루 막막해

두 아이의 엄마 김미숙(가명) 씨의 소원은 딱 한 가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을 그만두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조차도 “사치”라고 말했다. 자꾸만 포기하게 된단다. 무더웠던 여름에 아이들과 먹고 싶은 빙수도, 집에서 물이나 마시자는 마음으로 포기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포기하고, 주거 환경도 하나씩 포기했다.

 

이혼, 그리고 두 아이

27세의 나이에 번듯한 직장을 가진 전 남편을 만나 2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할 때까지도 김 씨는 전 남편이 도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큰딸이 5살이 됐을 무렵 이혼하고 친정에서 살았다. 어린 딸은 삼촌을 아빠처럼 따랐다. 아니 아빠로 받아 들였다.

그런 모습에 엄마로서 마음이 아팠던 김 씨에게 전 남편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아보겠다”며 찾아왔다. 하지만 재결합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다시 도박에 손을 댔고, 결국 또 다시 갈라서야 했다. 그때가 둘째아이가 첫 돌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그는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알았지만 아이를 전 남편에게 맡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비정규직의 삶

김 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숙식을 제공해주는 식당을 찾았다. 어린 아이들을 엄마 없이 집에 둘 수도 없었고, 보육 시설을 보내기엔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을 일터에 데리고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차례 일을 그만두고 다시 찾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자랐다.

첫째가 둘째를 잠시라도 돌볼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자 LH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지원받은 전세자금과 갖고 있던 250만 원을 더해 세 가족의 둥지를 마련했다. 낮에는 식당일을 하고, 아이들을 하교시켜 밥을 먹이고 잘 무렵에 다시 나와 대리운전을 하면서까지 살았다. 하지만 비정규직이었기에 항상 불안함을 안고 생계를 이어와야 했다.

 

연이어 다친 골절로 생계 어려워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무리하게 일한 탓에 뼈가 약해진 것인지, 재작년 언덕을 오르다 오른발을 삐끗했다. 살짝 삐끗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통이 너무도 심했다. 화요일에 다쳤지만 서산에서 통학하는 아이들 걱정에 참다가 금요일 오후가 되서야 병원에 찾았다. 생각보다 심한 골절로 수술까지 해야 했고 병원에서는 3개월 간 무리한 활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생계 활동이 먼저였기에 재활을 포기하고 3일 만에 퇴원했다. 그러자 이번엔 왼발이 문제가 됐다. 쟁반을 들고 있어 미처 보지 못한 문턱에 걸려 넘어졌고 깁스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식당일도 할 수 없었다. 깁스를 풀고 보호대만 착용한 채 택배일을 하고, 밤잠도 자지 못하고 부업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상황이다.

 

자격증도 사치…3개월의 꿈

김 씨는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불안정한 비정규직은 너무도 위험했다.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자꾸만 현실에 부딪혀 포기해야만 했다. 간호조무사는 1년의 교육 과정을 거쳐야 했고, 좋아하던 요리 자격증은 취득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도전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김 씨가 찾은 것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이었다. 국비가 지원되며 다른 자격증보다 교육과정이 짧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배우고 싶고 취득하고 싶은 자격증”이라며 “하지만 공부를 위해 3개월 간 생계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덧붙여 “아이들이 아닌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거 해”

한 번은 딸의 선생님으로부터 “딸이 특수 분장에 소질이 있다”며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에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딸이 “특수분장 안 배워도 된다”는 말을 꺼냈다. 또 수화에 재능이 있는 아이가 전문적으로 수화를 배우고 싶어 했지만 인근 지역에 학원도 없었고 경제적인 부담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책임지려고 노력했다”면서 “하지만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더라”며 허탈해 했다. 이어 “딸이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도 자기가 먼저 판단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볼 때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나 때문에 아이가 위축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딸은 저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는 것이 엄마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어 하는 것 다 시켜주고 싶어요. 아이가 ‘엄마. 이거 해도 돼?’라고 할 때 돈 고민 없이 ‘응. 너 하고 싶으면 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근데 그게  너무 어렵네요.”

 

“그래도 살아야죠”

“힘들어도 아이들과 남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을 거예요. 항상 밝게 일하자는 마음으로 일부러 목소리 톤도 높게 해요. 그래야 버티거든요. 힘들다고 하면 더 힘들어 질 것 같고, 아무 것도 안하면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지쳐요. 가끔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그럴 때 아이들을 보며 힘을 내 일하지만 또 지치고, 다시 힘을 내도 또 지치고… 끝없이 반복하죠.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 하지만, 기약 없는 ‘그 언젠가’에 과연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살아야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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