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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10.12 21:51
  • 호수 1227

[기고] 소리 없는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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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당진수필문학회·나루문학회 회원

축 처진 꼴이 안쓰럽다. 죄지은 사람이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것처럼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냐는 협박은 진짜 무서운 거였다.

팔팔 끓는 냄비에서 꺼낸 부직포 행주는 벌건 얼굴로 기가 팍 죽어있었다. 뻣뻣하게 말라서 퀴퀴한 냄새 따위 아랑곳하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뜨거운 맛'을 보고서야 완전히 영혼까지 탈탈 털린 모습이라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와, 장난 아니게 무서운 표현이네.’
‘사람들은 알고 쓰는 건가? 헉! 알고 쓰는 거면 더 무서운 거잖아.’

또 시작이다. 입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부족하고, 생각이라 규정하기엔 나에게 거는 목소리의 크기가 자못 크다. 모노 드라마쯤 되려나. 딱 꼬집어 정의할 수 없는 이런 현상은 내게 종종 있는 일이다. 내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시끄럽게 주절대는 것. 수다는 소리없이 계속된다.

한 번 말문이 트인 목소리는 절대 쉬는 법이 없다. 레몬청을 하려고 레몬들을 잔뜩 사온 날에도 그랬다. 베이킹소다를 묻혀 칫솔로 레몬을 하나씩 닦다가 레몬청을 선물해 준 그녀가 떠올랐다. 발동 걸린 목소리가 그녀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읊조린다.

 ‘받을 땐 몰랐어. 뭐든 그렇잖아. 만들 땐 많은데 먹을 땐 적다구. 먹는 것만 생각하느라 닦고 잘랐을 너의 수고는 생각도 못 했네. 더 고맙게 받을 걸. 늘 뒷북이라 미안타.’

오랜만에 훈훈한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메울 때쯤, 손이 시려왔다.

‘레몬이 좀 많았나. 뜨신 물로 닦을까. 내가 애초에 살림 똑소리나게 하는 걔를 따라서 뭔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게 문제였구만. 아... 하기 싫다.’

속으로 말하는 습관은 그 때부터였지 싶다. 남에게나 있을 법한 유산 싸움이 엄마에게 일어났던 때,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대학이란 모름지기 아들만 보내는 거라는 확고한 철학이 있으셨던 외할아버지의 큰 은덕이었다.

재산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아니 큰아들 앞으로 모두 돌려놓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외삼촌들은 당연하다는 듯 유산 상속에서 여자형제들을 제외시켰다. 엄마는 유산포기 각서에 서명을 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다그친 것은 외숙모였다. 엄마에게는 손아래 올케, 나이차 많이 나는 동생뻘 올케였다. 돈보다 우애가 더 중했던 엄마는 유산을 포기하셨다. 남동생들에게 모두 내어주는 것이 익숙한 엄마와 이모들이었다.

배운 것들이 도리를 모르니 내가 그들의 누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단다. 아들만 바라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기대한 자식의 모습이 저지경이니 눈물도 아깝단다. 엄마의 깊은 상심은 온전히 내게 전해졌다. 수화기 너머 들리던 외숙모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했다.

언제고 마주치면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짚어 주리라 생각하며 속으로 말하는 연습을 시작했었다. 격분해서 쏘아대기도 했고. 차분히 퇴고해 가며 간결한 문장을 찾기도 했었다. 꿈에서 만난 외숙모에게 속사포처럼 연습한 대사를 쏟아내며 울다 깨기도 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뜨거운 응어리를 잘 요리해서 내놓으려고 숱하게 고민했었다. 그게 내 모노드라마의 시작이었을 게다.

내 머릿속 목소리가 실시간 녹음이 된다면 모를까. 떠들어도 너무 떠들어대는 통에 머릿속 수다는 언제나 본방송이 마지막 방송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생생한 목소리로 떠오르면 가끔은 퇴근한 남편에게 들려주겠노라며 저장버튼을 눌러보지만, 고작 몇 시간 아니 몇 분 만에 기억이란 놈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토록 되뇌던 대사들을 외사촌 결혼식장에서 마주친 외숙모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속절없이 안부 인사를 물었던 그 때처럼 말이다.

주방 불을 끄고 안방으로 향한다. 분홍색 키티 이불을 덮고 자는 남편이 귀엽다. 딸이 쓰던 이불을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은 잘 때가 참 예쁘다.

‘딸이나 남편이나 잘 때가 제일 예쁘구만.’

내 안의 목소리가 마음을 떠나 머리를 맴도는데 남편이 눈을 번쩍 떴다. 예쁘단 소리 들은 건가. 순간 깜짝 놀랐다.

“자는 모습이 예뻐서 보고 있었지. 깼어?” 머릿속 목소리가 자연스레 밖으로 나왔다.
“그럼 그렇지. 밥 달라 물 달라 안 하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니까 좋았어?”

남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주절댔다.
‘그럼 그렇지. 내 목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지.’

그에게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냐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역시 혼잣말은 대답 없는 나에게 하는 독백일 때가 제일 행복한 법이다. 소리 없는 수다는 말을 잃었고 나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내일이면 어차피 잊혀질테니…….

※위 글은 2018 나루문학 우수작에 선정된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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