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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3-28 10:4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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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사우디 근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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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면 진관리에서 태어난 나는 젊었을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사도 지었다. 그러다 26세 초반 월남전에 참전했다. 참 치열했다. 눈 앞 1m 전방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다행히 땅에 엎드려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래도 어깨와 등, 팔에 포탄 파편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 당시 헬리콥터로 이송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그 후 한 달 간은 귀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귀가 잘 안들린다. 젊었던 그 때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쟁터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죽음이 겁나기도 한다.

1.
이 사진들은 현 월남참전자회 당진시지회인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의 주년 행사 및 강연회 때 촬영한 사진이다. 옆에 있는 사람은 이철환 전 당진시장과 윤수일 전 당진시의회 의장이다. 그때 유공회원들과 함께 전국에서 열리는 국가안보결의대회에 참석하곤 했다. 재임 당시 베트남으로 전적지 순례를 다녀온 적도 있다. 베트남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전쟁 당시 베트남 땅굴에 살던 한 간호장교를 붙잡았다. 얼굴이 새하얗고 몸이 매우 왜소했다. 그를 헤치라며 칼을 손에 쥐어줬는데 나는 명령대로 하지 못했다. 내 뒷사람도 그 뒷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참혹한 전쟁은 베트남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슬픈 과거다. 한편 순례 당시 한 베트남 사람이 어눌하게 한국말을 하며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한국군이었던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는 모습에 고맙고 미안했다.

2.
나는 슬하에 세 자녀를 뒀다. 27세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중매로 아내 김유환 씨를 만났다. 큰 딸 장엽이와 두 아들(강동·목동)을 낳고 키웠다. 하지만 아들 강동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떠날 때 어린 아이들과 아내만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팠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매일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래도 그 때 아내가 아이들 사진을 보내줘 많은 힘이 됐다. 나도 내 얼굴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 사진은 그때 아내가 보내 준 두 아들의 모습이다. 내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혹여 내가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돼 내 손부터 봤다고 한다. 다행히도 무사히 한국에 왔고 그 후에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 한편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아들 운동회에 갔다. 나는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아빠와 함께 달리기 하는 시간이여서 아들이 애타게 날 찾았는데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퉁퉁 불어 삐쳐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2-1 사진에서 오른쪽에 있는 강동이가 그 주인공이다.

3.
우리 손자와 손녀들 사진이다. 딸과 아들들은 매우 착하게 잘 커줬다. 자녀 모두 고대초와 고대중을 졸업했다. 딸은 당진여고를, 아들은 각각 대전 둔산고와 호서고를 다녔다. 지금은 모두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집에 올 때마다 반갑고 좋다.

4.
아들 강동이가 대학시절 공부하던 건축 설계도다. 아들은 건축학도인데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지금은 찾지 않을 자료지만 혹시나 나중에 볼까 싶어 차곡차곡 정리해뒀다. 우리집 가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딸과 아들들이 잘 커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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