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입력 2019.02.26 00:13
  • 호수 1245

[NGO 칼럼] 2.8 독립선언, 3.1운동 100주년과 YMCA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중원 당진YMCA 사무총장

2.8독립선언과 3.1운동은 한국YMCA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는 평생 YMCA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구한말 민족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국YMCA 선배들에게 고개가 숙연해진다. 그날의 그 역사와 현장 속에 마치 내가 있는 듯 흥분이 되고 가슴이 설레고 감격하게 된다.

먼저, 일제시대인 1919년 2월 8일, 적의 심장부인 동경의 조선YMCA 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400여 명(YMCA회원 170여명 포함)이 사전에 모의 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시가행진을 예정했으나 일본경찰의 저지로 무산, 주동자 9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8선언문에 서명한 11명 중 김도연, 송계백, 백관수는 YMCA 지도자였다.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3.1만세 운동은 그해 9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은 16명이고 YMCA관계자는 9명이었다. 서울YMCA 출신 김원벽, 함흥YMCA 출신 이순기, 대구YMCA 이만집 목사, 광주YMCA 김철 등 주동자 역할을 하며 지역의 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국적으로 창립전후의 지방 YMCA와 학생조직이 있었던 YMCA는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와 기독교 인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은 그야말로 기독교운동이라고 얘기 할 수 있다. 그 사실은 3.1운동에 참가인수 21만 명, 사망자수 7500명, 중상자 1만 6000명, 잡혀간 사람 수 4만 7000명으로, 독립 운동 이래 2년 간 이 운동에 관계한 대다수가 기독교임에 대하여 선교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 경찰이 추궁한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나서고 싶었지만 힘이 약하여 조직적이고 세력이 강한 기독교와 손을 잡기로 방책을 세웠다”는 최남선의 증언을 전택부 선생이 직접 면담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독립선언문 초안은 YMCA 지도자인 이상재 선생 등 기독교 인사들에 의하여 사전에 검토수정 되었다. (전택부 지음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특기할 것은 3.1운동의 방법론을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할 때 다수인은 한결 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이상재 선생은 남을 살육하느니 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하여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어 인류역사상에 우리가 영광스런 사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민강배 저 『서울YMCA운동사 1903~1993』)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어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안과 만주 연해주 등 해외에 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국내에서는 민립대학기성회 조직을 필두로 평양YMCA 조만식 총무의 물산장려운동과 절제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또한 3.1 만세운동은 왕조의 회복이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 수립의 계기가 되어 양반귀족 지도자 대신 평민지도자가 대거 등장하여 민족운동을 이끌게 되었다.(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YMCA와 사회를 일군 사람들』) 

학생YMCA는 1910년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도 지속적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 학생운동의 거두 김원벽이 있었다. 그는 동대문에 있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서대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제1회 입학생이다. 학생신분으로 서울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승동교회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종로에 위치한 서울YMCA의 중요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에 15인을 더한 48인 가운데 가장 젊었던 청년이었다. 제2차 시위를 3월 5일 남대문 역전광장에서 거행하기로 하고 전날, 학생대표들이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결의하고 김원벽과 강기덕을 최고지도자로 위임하였다. 당일 9시 경 수천 명의 중등이상 학생들은 남대문 역전에 모여 시위를 강행하였다. 이 시위는 지방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보고 고향에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만세운동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 귀가하기 위한 군중 수가 수만 명의 달했다. 제3차 시위는 김원벽 등 주동자들의 검거로 무산되었다. 

서울의 3.1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은 당진에서도 3월11일 면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로서는 전국 최초로 전교생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3.1운동이후 1920년 8월 미국정부에서는 상하의원 조사위원단을 파견하였으나 조사활동에 대해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무산되는 듯했으나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의 노력으로 일행 중 허스맨 외교의원이 서울YMCA를 전격 방문하여 800여명의 관중들 앞에 환영회 연설을 가졌는데  이에 놀란 정복경찰 수 백명이 폭력으로 해산하는 등 미국, 일본 조야에 파문을 일으켰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3.1운동의 연속으로 보아 제2차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한국YMCA는 3.1운동 이후 전국적 조직을 강화하고, 교육, 소년, 체육사업은 물론 농촌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함흥, 선천, 평양, 대구, 광주, 원산, 전주, 김천 ,신의주YMCA 등으로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 해산된 독립협회 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된 초창기 한국YMCA 운동의 역사와 정신은 YMCA 운동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지침서이다. 오늘날 국내 정치상황, 이념적 갈등, 남북관계 과제 등을 직면한 우리들에게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비폭력 만세운동과 촛불혁명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와 혜안을 갖고 고난의 한국역사를 헤쳐나간 YMCA 선배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본받아 정의가 샘솟고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 사회건설을 위한 노력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작은 소망인 북녘 땅에 평양YMCA, 함흥YMCA, 원산YMCA, 신의주YMCA 등 재건을 꿈 꿔 본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