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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9.03.08 22:06
  • 호수 1246

[문화 칼럼]문옥배 당진문화재단 사무처장·음악평론가
일제강점기의 문화예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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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의 소산물로서 문화예술이 생산되기에, 문화예술은 사회성ㆍ역사성ㆍ정치성을 띠게 된다. 사회의 현상을, 이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사회성, 그 표현된 작품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로 인하여 어느 시대고 정권은 예술을 통제하려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은 순수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몰고 간다.

특히 대중에게 불리는 노래 중에는 그 사회의 지배 체제에 위배되거나 가치기준을 깨뜨리는 것이 있다. 지배 체제는 그러한 노래를 통제하고자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게 되고, 곧 ‘심의’ 또는 ‘검열’이라는 장치가 생겨났다. 그 결과물이 정부의 금지곡인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검열을 통한 음악에 대한 통제는 일제강점기로부터 비롯됐다. 일제의 모든 문화정책은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수많은 법령을 제정, 시행했는데, 법률ㆍ칙령(勅令)ㆍ제령(制令)ㆍ부령(府令)만도 36년간 1만여 개나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법령을 통하여 노래책, 음악공연, 레코드, 학교교육을 통제함으로써 노래의 소통을 통제했다.

1930년대 레코드 시장이 성장하자 일제는 레코드의 통제를 위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33년 5월 부령 제47호 「레코드취체규칙」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레코드의 제작 및 판매를 위해서는 사전에 허가를 맡아야 하며, 발매 후에도 노래에 문제가 발생하면 레코드를 압수할 수 있게 한 조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노래와 레코드에 대한 통제뿐만 아니라 공연예술인의 통제를 위한 법령으로 1944년 5월 부령 제197호 「조선흥행등취체규칙」을 공포하여, 조선총독부의 공연예술인 허가증인 기예증을 받아야만 공연활동이 가능하게 했다

일제는 일본어 상용정책을 노래에까지 강요하여, 1943년부터는 조선어로 된 레코드의 발매를 금지했으며, 영ㆍ미 음악을 「적성음악」(敵性音樂)이라 하여 금지시키기도 했다.

일제는 노래와 레코드, 공연예술인에 대한 통제 외에도 가요정화운동, 국민개창운동 등을 통해 통제된 노래를 대체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노래운동으로 소통된 노래들은 일제의 체제에 순응, 찬양, 고무하는 내용의 가사를 가진 노래들이었다.

노래책의 출판금지와 레코드의 판매금지 및 가창금지에 대한 처분 사유로는 ‘치안’ㆍ‘치안방해’ㆍ‘풍속괴란’ 등이 있었는데, 치안 및 치안방해의 사유에 해당하는 검열기준은 한국의 민족적 전통과 정신(혼과 얼)을 담은 노래, 한국 독립을 희망하는 항일노래와 반일노래,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프롤레타리아노래 등이었다.

이러한 검열기준은 일제의 노래에 대한 통제가 식민지 통제정책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증명한다. 노래에 대한 제도적 통제장치는 지배 체제에 의해 계획ㆍ조작ㆍ통제됨으로써 관리된 사회를 만들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의식까지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문화예술은 대중들에게 그 내용을 통해 그들의 규범ㆍ가치 등을 선택적으로 전파하기에 일제는 문화예술을 통치차원에서 통제한 것이다.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 정부는 왜색가요의 음반판매와 공연을 금지하였다. 당시 사회의 시대적 과제이자 사회적 흐름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문화 수립이었기 때문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일제강점기의 문화예술통제를 되살피면서 문화예술이 갖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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