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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2 14:09
  • 수정 2019.03.13 21:27
  • 호수 1247

[3.1운동 100주년 특집 특별기고 3]
김좌진·한용운·김복한 관련설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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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호서고등학교 교사

>> 편집자주_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당진에서도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과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번호부터 5회에 걸쳐 김남석 호서고등학교 교사의 글을 연재한다.

 

199명 체포 및 120명 서훈받아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이하 ‘4.4 만세운동’으로 줄임)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자 한다. 4.4 만세운동이란  대호지면과 정미면 주민들이 1919년 4월 4일 천의장터에서 일본 경찰에 맞서 싸운 독립만세운동을 지칭한다.

일찍이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도호의숙 유생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전 주민을 동원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이인정 면장을 비롯한 대호지면사무소 직원과 합세하여 ‘도로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대호지면 9개리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5일장이 열리던 4월 4일,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하여 정미면 천의리 천의장터로 행진하였다.

약 400명에 이르던 출발 당시의 주민들은 천의장터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엄중하게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를 제지하는 천의주재소 일본인 경찰에 맞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결과 사망 1명, 옥중 순국 3명, 징역형을 받은 분이 39명, 태형을 받은 분이 88명, 기타 옥고를 치른 분을 포함하여 모두 199명이 피해를 당했다.

이 중에서 현재 120명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천의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인근 지역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대호지면과 정미면 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좌진·한용운·김복한 관련설

4.4 만세운동이 강력한 독립운동이었던 만큼 그 배경도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배경은 ‘도호의숙 유생의 척사사상’이었다. 지난 호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도호의숙은 의령남씨의 종숙으로 1860년대 대호지면 도이리에서 설립되었다.

의령남씨 충장공파 후손들은 남유(?~1598)와 남이흥(1576~1627)의 충절사상과 무학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도호의숙에서 심신을 연마했고, 20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도호의숙은 1906년 유진하(1846~1906)를 훈장으로 초빙하면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화서학파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들은 화서학파의 다른 지역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척사정신을 더욱 고취시켜 나갔다. 한말의병으로 활약한 충북 제천의 유인석(1842~1915)과 전북 태인의 최익현(1833~1906)은 모두 도호의숙 유생들과 사상적인 맥락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4.4 만세운동의 배경에는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과의 관련설이다.

김좌진과 남주원, 남상학, 남정

김좌진(1889~1930)이 4.4 만세운동의 배경에 관련되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첫째, 김좌진은 서울로 올라갈 때 육로보다 해로를 주로 이용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대호지면 사성리 포구였다는 점이다.

이 때 김좌진이 엄지손가락으로 석자 쇠못을 박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도 대호지 주민들에 전해오고 있고, 성연면 예덕리의 ‘도둑 고개’를 넘을 때 산적의 습격을 받고 이를 물리쳤다는 전설도 있다. 두 번째는 김좌진이 남주원(1893~1946)과 매우 가까웠다는 점이다.

남주원은 다음 호에서도 서술하겠지만, 대호지면의 최대 부호였다. 그의 집터는 2433평에 달할 정도였다. 그는 대호지면 사성리 포구 인근에서 거주하면서 수많은 우국지사를 식객으로 머물게 하였다. 특히 남주원의 부인인 오원근 여사와 김좌진의 부인인 오숙근 여사가 같은 해주 오씨 집안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이 가까운 집안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같은 집안의 같은 학렬 임은 틀림없다. 그 때문인지 김좌진의 집안에서는 오숙근여사를 통해 대호지 똑대기터(운선타는 곳)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세 번째는 김좌진이 남상학, 남정과 관련 있다는 점이다. 남상학(1890~?)은 김좌진보다 한 살이 적으나 김좌진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1918년 만주로 떠났고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전사하였다. 남정(1880~1950)은 1923년 길림의 정의부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신청사 폭파를 목적으로 활동하던 창의단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된 애국지사다.

홍성과 만주 길림에서 전개된 남정의 독립운동도 김좌진의 독립운동과 겹친다. 이와 같은 점을 살펴볼 때, 김좌진은 대호지의 남주원, 남정, 남상학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을 것이고 이들의 치열한 독립정신이 4.4 만세운동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한용운과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

두 번째는 한용운과의 관련설이다. 한용운은 도호의숙의 훈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한운석과 연결된다. 한운석은 4.4 만세운동 당시에 애국가를 작사한 인물로 투철한 독립정신의 소유자였다. 첫째, 두 사람의 고향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한운석은 홍성군 결성면 금곡리 출신이며, 한용운은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신이다. 두 동네는 매우 가깝다.

둘째, 연령이 같다. 한운석과 한용운은 1878년생으로 동갑이며, 한운석은 37세인 1915년에 금곡리를 떠나 대호지면 도이리에 이사 왔다. 한용운은 적어도 16세 정도까지는 고향에서 한학 연마에 몰두하였고, 동학혁명이 일어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셋째, 한운석과 한용운은 어린 시절 한학 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운석은 고명한 한학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도호의숙 훈장으로 초빙되었는데, 도호의숙은 한말의 유진하가 교육하였던 교풍을 계승하여 한학수준이 매우 높았다.

넷째, 한운석과 한용운은 청주 한씨로 같은 집안 인물이다. 얼마나 가까운 집안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서로 교분을 나눌 정도의 관계설정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던 도호의숙 유생들은 한운석이 소개해 준 한용운을 통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구해 귀향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한운석은 애국가를 지어 4.4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김복한과 남정·남주원·남규희· 남상혁

마지막으로 김복한 관련설이다. 김복한(1860~1924)은 한말 홍성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1895년 을미의병에서 시작하여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홍성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던 1919년 3월에는 유림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내포지역 성리학의 대표 학자였고, 척사론에 기초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첫째, 남정의사가 있다. 남정은 1906년 정산에서 발발한 병오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정산, 공주, 홍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했다.

이 때문에 남정은 김복한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둘째, 남주원과의 관계다. 남주원은 4.4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조부인 남명선의 묘비를 세웠다. 이 묘비를 지은이가 김복한이었다. 또한 남규희의 묘비를 지은이도 김복한이었다. 셋째, 남상혁이 김복한의 수제자였다는 점이다.

남상혁은 4.4 만세운동 직전에 김복한의 문하에서 수학 중이었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복한은 남상혁에게 대호지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남상혁은 한걸음에 귀향하였고, 남주원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후일 김복한의 제자들이 유고문집을 간행할 때, 남상혁은 발기인 대표로 선정되었다. 두 분은 각별한 사제 관계였다.

이상과 같이, 4.4 만세운동의 배경을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과의 관계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일부 전설적인 부분도 있고 실증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그 신빙성은 매우 높다.

그 한가운데 남주원이 있다. 남주원은 깊은 학문과 경제력을 활용해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과의 교류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정신과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주고받았다. 4.4 만세운동의 근원적 배경은 이토록 넓고도 깊었다.

 

<글 싣는 순서>
1.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2.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독립만세운동과 주동 학생들
3.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과 김좌진·한용운 관련설   4. 4.4독립만세운동의 참여인과 이인정, 남주원, 송재만 5.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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