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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101세 노인 이송우 옹(원당동)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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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6.25전쟁까지 겪어
매일 복지관 데려다 주는 며느리에 “고마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그해 11월, 이송우 옹은 송산면 송석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가 지나 광복이 찾아 왔고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했다. 1960~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까지 역동의 근대사를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101세가 됐다.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는 이송우 옹은 백수를 넘긴 오늘이 행복하다. 요즘 매일 당진시노인복지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그는 20살이나 차이나는 젊은(?) 친구를 앞에 두고 장기 두는 재미에 푹 빠졌다. 뒤늦은 즐거움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다. 

“일생 편케 못살아”

이송우 옹은 “일생을 사는 동안 편케 못살았다”고 운을 뗐다. 일제강점기, 시골마을인 송석리 역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가르쳤다. 일부 가정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며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송산국민학교를 다녔던 그는 12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아버지가 재혼하며 새어머니가 집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이 옹은 객지생활을 했다. 교통편이라고는 배뿐이었던 그때 오섬(현 송산면 오도리)에서 7시간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만석동에 있었던 방직회사에서 몇 년 간 근무했지만 집이 그리웠던 이 옹은 다시 고향집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꼬박 하루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일본 탄광으로 떠나

하지만 막상 집에 오니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고 쇳물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다녔다. 거기서도 몇 해 일하다 집이 그리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이 옹은 등기와 매매를 대리로 작성하던 대서방을 다닌 아버지 대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다 25세가 되던 해 일본이 탄광에서 일 할 인부를 각 읍·면마다 100명씩 모집했고, 이 옹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탄광은 어둡고 축축했다. 그곳에서 탄광을 지탱하는 나무 기둥을 교체하는 일을 했다. 2년 남짓 일했을까. 미군이 그가 일하는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장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던 소금배에 몸을 실고 겨우 고국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들린 해방소식

당진으로 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 소식이 들렸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의 입을 타고 해방소식을 접했다. 그 무렵 그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고 두 형제를 낳아 키웠다. 하지만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했다. 하나 둘 마을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마을에 남았지만 3년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휴전선이 그어진 후에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다섯 아이들을 낳아 키웠다. 그는 “살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다사다난한 시절엔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먼저 떠나보낸 아내와 아들

원당동 충남자동차운전전문학원 뒤로 터를 구했다. 흙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살았다. 아내는 50세가 됐을 무렵부터 몸이 아팠다. 그는 “연년생으로 아이 다섯 낳고 키웠으니 몸이 쇠할 수밖에 없었다”며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속으로 ‘환갑까지만이라도 살아 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늘이 들었는지 아내는 환갑을 지나고도 15년을 더 살다 이 옹의 곁을 떠났다. 이 옹은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는 첫째 아들네 집에 잠시 살기도 했다. 당시 나이 88세로 화곡동 노인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다. 이 옹은 “4년 동안 노인회장을 맡으면 90세가 넘어서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그때도 그가 100세를 넘길 줄은 몰랐단다. 하지만 부모보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이 옹은 다시 당진에 오게 됐다. 

원당중앙교회 개척에 손 더해

한편 그는 지금의 원당중앙교회가 세워지는데 손을 더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다닐 교회를 짓고자 했다. 손수 벽돌을 쌓아 올리며 어렵게 없는 돈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마을 사람들도 소매를 걷고 일을 도왔다.

주변에서 도움을 준 덕분에 번듯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고. 교회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며 장로로 추대했고, 현재는 원로장로를 맡고 있다. 그는 “교회를 짓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 지금의 원당중앙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기 친구들도 생겨”

101세지만 여전히 건강한지라 집 주변 밭을 일구곤 했다. 밭을 돌보고 잇던 어느 날 며느리가 “노인복지관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며느리는 “아버님이 자꾸 일을 하려고 해서 자녀들 걱정이 많았다”며 “노인들이 다닐 수 있는 복지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진시노인복지관을 직접 찾아가 방문한 뒤 아버님에게 소개했다”고 말했다. 

매일 같이 며느리는 이 옹을 복지관으로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온다. 요즘에는 복지관을 가기도 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리고, 종종 날이 궂어 가지 못하는 날에는 무척 속상해 하신단다. 이 옹은 “장기 친구들이 생겼다”며 “친구들과 장기를 둘 때면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한편 며느리는 “복지관을 다니면서 아버님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가족들도 좋아한다”며 “평생 장로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 온 아버님이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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