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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19.04.05 19:28
  • 호수 1251

[종교칼럼] 신앙과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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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재 원당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어떻게 선(善)이 악(惡)을 이기고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비판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는 합리론(合理論)과 지식의 근원은 오직 경험에서만 찾겠다는 경험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밤하늘에 별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도덕법이 있다고 했다. 양심을 믿었고 양심이 희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이 살아 있다면, 세상은 평화롭고 우리의 삶 속에서 법(法)이라는 것이 필요 없어야 하지 않을까? 

종교는 인간에 대한 신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 중요시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로마서 3장에서 사도(使徒)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바르게 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오직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인정을 받아도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죄는 예수 안에서 씻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죄인일 수 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든지 의인이다. 

문제는, 교회나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세상 속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다고는 하지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데, 정치나 경제적인 욕심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민족이나 개인 간의 근본적인 분쟁의 불씨는 결과적으로는 종교적인 사람들의 정치나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종교적 의지’라는 말로 포장하여 그럴듯하게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순우리말에 ‘고지식하다’는 말이 있다. 융통성이 없다는 뜻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융통성이 없는 분이 아니시다. 더군다나 실천하지 못할 높은 차원의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삼고 있다. 어떻게 판단을 하든지 판단의 근거나 과정이 정직하고 공정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共感)한다면, 그 결과에 크게 반발하지는 않는다. 행할 수도 없고, 행하려는 의지도 없는 높은 차원의 종교적 신념을 말하며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이 이해할 수 있고 상식이 통하는 수준의 도덕성. 그리고 정직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세상에 비춰져야 할 신앙인들의 바른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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