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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
카세트 들고 전국 다녔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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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문 당진시 안전총괄과장

1980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후 입대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서천군 장항읍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고향(순성면 중방리)이 있는 당진으로는 1989년에 왔다. 고향이라 반가움도 잠시, 대호지면사무소로 발령받아 꽤 고생했다. 지금에야 도로 사정이 좋지만 당시에는 ‘울고 넘는 장정리’라고 불릴 정도로 장정리 고개가 높아 버스도 못 지나다녔다. 그래서 대조리를 거쳐 마중리를 돌아 꼬박 1시간 걸려 면사무소에 출근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오는 6월 퇴임을 앞두고 있다. 사진을 보니 지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1. 예산농업전문대학 토목과를 함께 다니던 R.C.C 모임 친구들이다. R·C·C는 철근 콘크리트 클럽을 뜻한다. 교련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 나다. 당시 종아리까지 올려 신던 빨간 양말이 등산 양말이었다. 친구들과 배낭을 메고 카세트 하나 들고 다니며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녔다. 이 친구들과는 아직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2. 아내(구본임)와 결혼할 때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살면서도 결혼식 때 아내가 든 부케만큼 큰 꽃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없어진 합덕의 행복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당시 나는 예산읍사무소에서, 아내는 송악농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결혼 후 예산에서 출퇴근하며 신혼생활을 했다.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가족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함께 해 준 아내에게 평생 고맙게 생각한다. 또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준 큰 아들 부부와 대학 졸업을 앞둔 막내아들에게 항상 고맙다.

3. 서해대교 개통을 앞두고 두 아들(강민, 강욱)과 함께 다리를 걸었을 때의 모습이다. 풍물단인 아내는 농악공연 때문에 사진을 같이 찍지 못했다. 주탑까지의 길이 생각보다 너무 멀어 아이들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4. 1995년 합덕읍민회관에서 합덕터미널로 향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할 때의 모습이다. 직접 현장에서 측량과 설계, 검측, 강도시험 등 공사 감독해 힘들었다. 모래자갈을 리어카로 퍼나르며 콘크리트 만들어 도로포장하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 도로과와 도시과에서 근무했다. 호서고 일대와 원도심만 있던 당진에서 지금의 당진이 되기까지 도시개발사업을 실시하고 도로 건설을 이끌어 왔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5. 석문간척사업소 근무 시절 당시 모습이다. 10.6km에 달하는 석문방조제는 송산과 석문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해 마지막 그 사이를 채우는 작업이 끝나야만 완성됐다. 마지막 작업은 비어진 사이로 흐르는 물살이 매우 거세기 때문에 수많은 덤프트럭으로 흙을 가져다 부어야 했다. 그때를 기념하며 찍은 사진이다.

6. 옛날 구 군청사에서 업무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지금의 시청사로 이전하기 전에 도시교통과 직원들과 현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짐을 옮기다가 아쉬운 마음에 찍은 기억이 난다.

7.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노트르담 대성당을 뒤에 두고 세느강변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얼마 전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방문했을 때도 1시간 이상 줄 서서 노트르담 대성당에 입장할 수 있었다. 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8. 마지막 사진은 어머니다. 20년 전 쯤 어머니를 모시고 당진 곳곳을 구경할 때 면천초 은행나무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어머니는 건강한 모습이지만, 지금은 98세로 몸이 많이 불편하다. 어머니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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